김미선 청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산은 어진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주고 山開仁者路
물은 지혜로운 이의 마음을 씻어 주네 水洗智人心
맑은 풍경소리는 어느 곳서 들려오나? 淸磬從何處
작은 암자가 숲속에 숨어 있는 듯 하네. 小庵隱樹林
「부용암을 찾아가며(방부용암訪芙蓉庵)」 -雪潭(설담)-
‘미래 사회 인간관의 위기’라는 현실적 문제가 대두되는 시점에서 최근 건강과 환경에 관심이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바로 불교문화가 가까워지고 있는 일면을 본다. 사찰음식 시식 행사에 오픈런을 하기도 하고, 불교의 의미를 타투로 새기기도 하고, 불교 행사에서는 EDM 음악이 울려 퍼지고 스님의 장삼 자락을 그대로 날리며 힙한 춤을 추기도 한다.
다만 사찰음식 시식에 연근(蓮根)으로 만든 음식을 좋아해 주는 20대 30대들에게 연꽃이 진흙에 뿌리를 박고 피어 나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 처렴상정(處染常淨)을 의미하건대 항상 청정한 정신을 지키는 연꽃의 본래 성품을 전해 주지 못한다면 입맛만 키우는 일이지 고구마를 먹거나 무우를 한번 베어 먹는 일과 무엇이 다르랴!
불교경전 법망경에서는 선근인연(善根因緣)이라 하여 전생에 선한 과보를 맺은 사람 간의 만남을 겁(劫)으로 표현한다. 천년에 한 방울씩 물이 떨어져 집 한 채 만한 바위를 없애는데 걸리는 시간이라 하여 43억 2천 년을 1겁이라고 한다.
이런 오백 겁이 쌓이면 옷깃만 스치는 인연이 되고, 천 겁을 쌓아야 비로소 같은 나라에 태어나고, 이천 겁의 인연이면 하루를 함께 걷고 오천 겁은 한동네 함께 태어난다고 한다. 부부로 맺어지는 인연은 칠천 겁의 인연이라 하니 인연 중에 가장 지중하다고 하는 부모자식 간의 인연은 몇 겁의 인연이란 말인가? 이러한 인연의 겁을 따라 깊은 산중 물소리를 들으며 설담(雪潭) 선사가 찿아 가는 부용암에는 산까치가 그 인연의 지기(知己) 련가 한다.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는 이러한 인연의 지기(知己: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인 천애지기(天涯知己: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그리운 사람)를 늘 그리워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만약 내가 지기(知己)를 얻는다면 이렇게 하겠다.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인다. 10일에 한 가지씩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 햇볕에 말려서 여린 아내로 하여금 강한 바늘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한 다음,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고 옥으로 축을 만들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이 있는 곳에다 걸어놓고 말없이 바라보다가 저물녘에 돌아 오리라.” 하였으니 지기를 얻으면 연약한 아내에게 부탁해 오색실로 지기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이것을 가지고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이 있는 산중에 걸어놓고 온종일 말없이 바라보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 가슴에 품고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옷깃만 스쳐도 오백 겁의 인연이다.
미래 사회 인간관의 위기라는 현실적 문제를 우리의 전통 사상인 불교의 인연법 또는 유가의 소중한 천애지기 교유에서 가만 들여다본다. 지금 우리의 곁에 누가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