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다.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한자어 인간(人間)이다. 고립되어 홀로 살 수 없음을 잘 드러낸 말이지만, 우리말에서는 이 둘을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것으로 정착했다. 문제는 근대 영어의 맨(man)과 휴먼(human)을 사람 또는 인간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 또는 그녀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고립된 존재로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라는 공동체를 전제로 할 때라야 비로소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적 동물’은 후에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그런데 서구 근대 문명은 중세의 교회공동체를 중심으로 벌어진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 자유로운 개인을 불러냈고, 점차 그는 이기성과 고립성을 전제로 자율적인 삶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지금 우리는 이런 서구식 인간관에 더 익숙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우리 생활 양식으로 삼은 결과이다. 한편으로 자유와 자율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움과 각자도생의 생존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빚어지는 일상의 비정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라가 충분히 살 만한 돈을 갖추었음에도 홀로 외로워하다가 정신적인 장애를 얻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도 하는 비극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방치할 수도 없다. 고립되고 이기적인 개인이 주인공인 사회에서는 가능하면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그것을 잘 알게 된 부모들과 사교육업체들이 힘을 모아 학교를 압박해 왔고, 우리는 좋은 성적을 거두어 일류대학을 나와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사회와 마주하게 되었다. 21세기 들어 이런 현상은 세계 전반으로 확산했지만, 유독 우리 사회가 더 심하다.
각 개인 사이에서 정착한 약육강식의 논리는 나라들 사이의 외교관계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힘이 센 나라들이 기후 위기를 부정하면서 탄소감축을 위한 협상장에서 뛰쳐나가고, 자기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망설임 없이 민간인들의 피해를 감수하며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인류 전체의 멸망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좀처럼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인간이지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인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출발점을 인간의 존재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인간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공감하면서 기꺼이 손을 내미는 이타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에 더해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하는 실상은 사람은 고립된 채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은 물론 동물과 자연, 우주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실상에 주목하는 새로운 인간상이 필요하다. 불교에서는 지옥과 하늘이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 중 하늘에는 인간보다는 뛰어나지만 여전히 온전하지는 못한 인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신이 존재한다고 상상한다. 그 신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구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그물을 갖고 있다. 이 구슬들이 곧 우리 인간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고, 그들 각각은 다른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영롱하게 비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중심과 주변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모두가 중심이면서 동시에 주변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인드라신의 그물, 즉 인드라망의 비유이다.
호모 인드라네티우스(Homo Indranetius)는 인드라망의 비유를 인간존재의 실상을 설명하는데 활용하고자 필자가 새롭게 구상한 인간상이다. 이성과 생각에 초점을 맞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인간상이 지닌 의미와 한계가 충분히 드러난 지금, 이제 평등하면서도 서로에게 깊게 의존하는 관계를 중심에 두는 새로운 인간관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호모 인드라네티우스를 전제로 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볼 수 있게 되고, 나 자신을 그 연결고리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인간 중심적인 한계를 벗어나면서도 보다 나은 두뇌를 갖춰 우리 지구가 처한 문제를 제대로 알아차리면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의 특별한 책임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 책임감을 바탕으로 일상에서 개인적으로 실천하고 힘을 모아 제도를 바꾸어가는 사회윤리적 실천으로까지 확장하면 우리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 일상의 실천은 또한 존재하는 것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끌어 행복을 공유할 수 있는 통로로도 열리는데, 그것은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정의, 자연에 대한 책임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통로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