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주완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부소장
외과의사이며 중화민국의 국부였던 쑨원(1866~1925)은 독서광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지인의 물음에 주저 없이 ‘책’이라고 외칠 정도였다. 중국의 전제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혁명의 길로 들어선 쑨원은 “혁명은 부단히 진화한다. 현상만 갖고는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없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길은 독서밖에 없다”며 온종일 책을 끼고 살았으며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하루 세끼를 맛없는 빵으로 때우던 힘겨운 외국 생활에서도 돈이 생기면 “생활의 어려움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몇 끼 굶는 것은 별개 아니지만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며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에 관한 서적들을 구입하여 읽었다. 혁명의 전쟁터에서 작전을 펼칠 때에도 한 손엔 신간 서적이 들려 있었으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조차 요즘 어떤 책을 읽는지를 반드시 물었다.
성호 이익(1681~1763)의 가문은 남인계 명문가였지만 부친은 당쟁에 휩쓸려 유배지에서 돌아가시고 형 또한 장살형으로 맞아죽었다. 남겨진 성호는 관직에 진출할 길이 막혀 집에서 책을 읽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일찍이 부친이 사신으로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많은 신간서적을 구입하여 집에는 풍부한 장서가 있었다. 성호의 독서의 결정체는 바로 <성호사설>로써 정치, 경제, 사회의 전 분야를 아우르며 과거제도의 모순 등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였다. 성호의 유고를 접한 다산 정약용은 “나도 성호와 같은 학자가 되겠다”며 학문방향을 일찌감치 정하였고, 학문을 쌓아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2등으로 급제하였다. 다산은 신유박해(1801)로 가문이 위기에 빠져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천지의 웅대함과 해와 달의 광명을 알 수 있게 된 것이 모두 성호 선생의 힘”이며 “박학한 성호어른, 우리들에겐 백세의 스승”이라며 성호를 추앙하는 헌시를 바쳤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직업은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지리학자, 작가, 요리사, 수학자로서 시쳇말로 융·복합적 능력을 겸비한 인재로서 그의 천재성을 드러나게 한 것은 독서습관이었다. 다빈치는 고전을 읽기위해 36세에 독학으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라틴어는 고대 이탈리아 중부의 넓은 평야지대에 살았던 라티움 사람들이 사용하던 민중언어였다. 현재 라틴어는 바티칸시국에서 사용 중이지만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등은 라틴어에서 파생되었고, 영어, 독일어도 라틴어에서 많은 어휘를 차용하였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변호사였던 키케로(BC106~BC43)는 고전 라틴어 표현의 전형으로 평가받으며 풍부한 작품을 집필하였고 수많은 영역을 연구한 라틴어 고전들은 다빈치에게 사고의 확장과 영감을 주었다.
세종(1397~1450)이 “내가 너희에게 집현관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어서다. 헌데 직무를 핑계로 독서에 전념하지 않으니 독서당에서 글을 읽어 그 성과를 보이고 변계량의 지도를 받아라”며 문신들에게 강제로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는 “(세종이) 밤 2시경 내관을 시켜 (집현전에서) 숙직하는 선비들이 무엇을 하는지 엿보게 했는데, 신숙주가 촛불을 켜 놓고 글을 읽다가 닭이 울자 비로소 취침하였다. (세종은 내관에게)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돈피갖옷을 벗어 깊이 덮어주라 했다. 신숙주가 아침에 일어나 이 일을 알게 되었고, 선비들이 이 소문을 듣고 더욱 학문에 힘을 쏟았다”고 적고 있다. 1천여 년 전에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도 “늙기는 쉬워도 배움을 이루기는 어려우니, 한순간도 가벼이 보내지 말라”하였다. 현재와 미래에 보이지 않는 힘들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생활습관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