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선 충북대 의대 명예교수·기생생물세계은행장
스미소니언박물관은 세계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자 연구 단지다. 영국인 과학자 제임스 스미슨은 1846년, 자신의 전 재산을, 평생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국에 기부했다. 그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당시 미국의 실험정신과 민주주의를 동경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은 그 규모부터 압도적이다. 말 그대로 세계 자연의 역사를 총망라한 박물관으로, 땅속과 땅 위, 물속과 물 밖, 하늘과 우주에 이르는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지구의 대표적 랜드 마크 여서, 항상 관람객들로 붐빈다. 놀랍게도 입장료는 무료이며, 국립항공우주박물관 등 17개 이상의 산하 기관 역시 모두 무료로 운영된다.
스미소니언 재단은 단순한 전시를 넘어 각 분야의 연구와 교육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미국 내외의 역사, 예술, 과학, 문화 등 인류의 모든 유산을 아우르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 내 미국립기생충컬렉션(U.S. National Parasite Collection)은 1892년에 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생충 표본관 중 하나다. 미 농무부 소속의 찰스 스타일스와 알버트 핫살 두 기생충학자가 주도했다. 스타일스는 1894년 자신의 개인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했고, 이때부터 체계적인 관리가 시작됐다.
초기에는 미국 내 동물 및 인체 감염 기생충 연구가 목적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이 해외에서 다양한 기생충 질환에 노출되면서 컬렉션의 범위가 크게 확장됐다. 사람과 가축은 물론 야생동물의 기생충까지 포함하게 된 것이다.
2013년, 미 농림연구청과 스미소니언 재단 간 협약에 따라 컬렉션 전체가 워싱턴 D.C.로 이관됐고, 2014년 6월 2일부터는 스미소니언이 관리와 운영을 맡았다. 이에 따라 표본 보존, 신규 수집, 데이터베이스화, 연구자 지원 등 현대적 관리 체계가 도입됐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축적된 방대한 표본과 자료들은 특히 인수공통감염병(동물과 사람 사이에서 전파되는 질환) 연구에 있어 과거와 현재의 기생충 및 숙주 변화를 비교·분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기생충 컬렉션은 일반 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지만, 전 세계 학술 연구자들에게는 표본 대여와 비교 연구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종의 발견, 질병 감시, 생물다양성 평가 등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스미소니언은 10만 개 이상의 기생충 표본 군과 2천만 점이 넘는 개별 표본을 보유하고 있다. 선충, 촌충, 흡충, 원생동물, 절지동물(이, 진드기, 벼룩 등) 등 북미 최대의 기생충 표본 컬렉션을 자랑한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이후 대대적인 기생충 박멸 사업이 국가적으로 추진되면서 많은 기생충 표본과 자료가 축적됐다. 마침내 2017년에는 국내 최초의 기생충박물관이 서울에 개관되어, 기생충 표본과 문서 등 역사적 자료가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기생충 수집과 보존의 역사는 인류가 기생충과 싸워온 역사이기도 하다. 기존 기생충박물관의 표본은 다만 대부분 포르말린에 보존되어 있어 형태 관찰이나 교육적 목적에는 적합하여도 유전자 분석 등 첨단연구에는 알맞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반면, 기생충(기생생물)은행은 기생충박물관과 달리, 유전자가 살아있는 표본과 첨단 보존 기술을 바탕으로 한 유전학 연구 및 신약 개발 등 현대 생명과학 연구에 필수적인 자원 인프라라고 할 수 있다. 즉 시작부터 목적, 보존 방식, 활용 범위 등이 서로 다른 것이다.
기생충은행은 살아 있거나 냉동, 건조, 알코올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본을 보존한다. 이로 인해 표본의 DNA, RNA, 단백질 등 유전물질 분석이 가능하여 유전자 연구, 신약 개발, 진단 시약 개발 등 첨단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이는 의학(진단, 신약 개발), 생물학(공진화 연구), 인류학(인류의 진화 및 식습관 추적), 자가면역질환 치료 등 다양한 첨단 연구에 기생생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전 세계 연구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인류 보건복지 향상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필자가 2005년 설립한 "기생생물자원은행”은 2020년 "기생생물세계은행"의 개칭을 거쳐 올해로 은행 설립 20주년을 맞이한다. 어느덧 성년이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