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 소설가

▲ 강병철 소설가

1967년 바깥 사랑방 벽에 대통령 후보 사진 일곱 장이 붙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눈에 익은 후보는 2번 윤보선과 5번 박정희였던 것 같다. 1963년, 그러니까 나의 초딩 1학년 때에 두 후보가 맞붙었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듣긴 했으니 4년 만의 리턴매치이다. 그렇게 열두 살이 된 소년의 집 바깥 마루에 방패연보다 더 큰 벽보 일곱 개가 주르르 붙었다는 건 무조건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1번 이세진 후보가 가장 잘 생겼던 것 같다. 콧수염이 흐릿하게 뻗어있었고 시원하게 넓은 이마가 내 동생 강병호와 비슷하게 생겨서 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염전집 막내아들 영원이를 닮은 4번 서민호 후보는 '병든 황소 갈아치자'며 집권당 후보를 겨냥해 기염을 토했으니 며칠 후에 사퇴를 했다고 소문만 들었다. 나머지는 오재영, 김준연, 전진한 등의 후보 이름이 아른거리지만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내 동무 김낙권까지 딱 두 명이 교실에 남아 동무들의 시험지 채점을 하는 중이었다.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던 김동배 선생님이.
“병철인 대통령으루 누가 될 거 같으냐?”
문득 이발소 김 씨의 ‘선글라스 낀 그 사람 덕분에 보릿고개에 국수라도 먹게 되었다’는 말씀이 떠올라서.
“박정희유.”
“낙권이 너는?”
“윤보선유.”
생강 값이 내렸다며 한숨만 푹푹 쉬던 벗의 아버지 영향도 있었으리라. 월계리 청금산에 사는 그 집 4형제는 모두 가무잡잡하고 눈이 부엉이처럼 땡그랬다. 아들 4형제 이름이 ‘낙원이, 낙권이, 낙천이, 낙우’여서 별명이 ‘낚지’ 하나로 통일되었다. 내가 얼떨결에.
"낚지야."
손나팔로 부르면 4형제 모두 동시에 고개를 돌린 채, 병옥, 병철, 병준, 병호 형제들의 이름을 따서.
“병아리.”
생뚱하게 놀리는 바람에 사납게 노려보기도 했다. 생강 가마니 쟁여놓은 벽으로 상장 몇 개가 주르르 붙어있던 그 사랑방이 오래도록 그리웠던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악동들이 우르르 몰려든 건 후보들의 얼굴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일곱 후보 사진 여기저기 노려보며 풋감자를 먹이거나 사금파리로 콧등도 긁었으니 그저 어리벙벙한 사태였다. 마침내 선두 주자 두 후보의 얼굴에 박치기를 넣더니 낄낄대며 개울 건너 달음질쳤다. 오솔길마다 아카시아 꽃이 하얀 포도송이처럼 고개를 숙이던 오월이었다.
손주가 없었던 모샛뜰 점백이 할아버지는 손짜장 집에서 거저 주는 낮술에 취한 채.
“나는 고무신 한 짝이라두 주는 인간한테 찍을 테여. 우이씨, 공짜는 없는 벱이여. 어치피 슨거 끝나먼 또 즈덜 세상이지 국물이나 있간디? 요새 같은 날 하루라도 대접 받으야징.”
공짜 막걸리에 기분 좋게 취했을까, 진둔벙 징검다리 건너다가 헛발질로 미끄러진 것이다. 뻐꾹새 날갯짓 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장네 머슴 영석이 형님이 리어카에 실어 옴팡집에 눕히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다시 4년 뒤, 1971년은 3선의 박정희 후보와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는 김대중 후보의 대결이었다. 야간 중학생이던 나는 고교생 선배들의 ‘3선개헌 반대’ 데모 스크럼 따라 광화문까지 진출했다가 통행금지 시간에 쫓기며 간신히 막차를 탔던 것 같다. 그보다 재미있었던 건 진복기 후보가 제도권 박기출 후보를 누르고 랭킹 3등에 올랐던 결과물이다. 진복기 후보는 카이저수염이 양쪽으로 길게 뻗친 얼굴이어서 소년의 뇌리에 만화처럼 쉽게 인식되었는데, 어느 주간지에서는 수염 한 짝에 5만5천표씩 얻어 동메달을 획득했다고 대서특필도 했다.
이상하다. 그 후로도 선거 때마다 집권당 후보는 딱 한 사람뿐이었고 나중에는 아예 체육관 선거로 패스되기도 했다. 그 사이에 소년은 여드름이 생기고 아랫도리도 여물면서 청춘 시대를 맞게 되었으니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흐른 것이다. 마침내 스물두 살 때 한탄강 상류의 군부대 막사로 이등병 입대를 했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 제정된 방식의 투표를 위해 조르르 줄을 섰다. 간접선거 도정의 오픈 게임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이니 너무 싱거운 만큼 관심이라곤 1도 없었다. 누구를 찍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냥 꾹 누르고 점호 준비에만 빠졌으니, 그 46년 전 일이 여전히 선명하고 수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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