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용웅 수필가

▲변용웅 수필가
▲변용웅 수필가

원색의 붉은 간판이 앞을 가로막는다. 인쇄체 큰 글씨가 위압감을 준다. ‘출입금지’, 그 밑에 좀 작은 글씨로 ‘군 통제구역’이라고 씌어있다. 철조망 안쪽은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서로 키재기를 하느라고 간판을 반쯤 가리고 있다.

영동에 모신 아버지 산소를 참배하고 어릴 때 살았던 쌍암리를 찾는다. 쌍암(雙岩)리는 지명이 뜻하는 대로 바위산이다. 아버지는 청춘을 바쳐 벌었던 돈을 이곳 광산에 투자했다가 몽땅 날린 한이 서린 곳이다. 진즉에 찾고 싶었지만, 읍내에 사는 먼 조카가 군 탄약고가 들어서 있어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겁을 주는 바람에 아예 발 디딜 생각조차 못 했던 곳이다. 역시나 육중한 기둥과 철조망이 걸음을 막아선다.

팔순 중반을 달리는 시간에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여기는 내가 태어나서 여섯 살까지 자랐던 곳이다. 괴목리 초입에서부터 심천면 기호리까지 30리 길 외딴집이었다. 어쩌다 영동 장을 보러 가는 기호리 사람 외에는 사람 구경조차 힘든 곳이었다.

이곳은 나의 독무대였다. 열한 살 위의 누나는 집안 살림하느라 바빴고, 가끔 아버지와 사냥을 즐기는 흰둥이 개가 나의 유일한 동무였다. 그러나 나는 심심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가꾸어 놓은 각종 채소밭이 내 무대이었고, 조금만 벗어나면 널따란 광산 연못이 있어서 잉어와 피라미 잠자리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뒤뜰을 지나 누나의 손목을 잡고 언덕을 오르면 산딸기 머루 다래 등 철 따라 맛있는 과일이 나를 유혹했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가끔 기호리 금강의 장어잡이에도 데려갔다. 낚시 대신 작살이었다. 됫박 크기의 상자 밑을 유리로 끼워 수경을 만들어 수심이 얕은 곳에서 자갈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들어내면 짙은 색의 장어 몸통이 드러났다. 작살로 찍으면 온몸으로 휘감으며 장어 한 마리가 잡혀 나왔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기잡이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형님이 오면 외딴집에 잔치가 벌어졌다. 광산 호수에 폭약을 던져 잉어, 메기 등 광주리로 가득 잡아 와 가마솥에 매운탕을 끓였다. 이때는 멀리 기호리에서도 어른들이 10리 길을 멀다 않고 모였다. 모처럼 외딴집에 사람이 들끓고 나는 그때서야 사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마당 가에 떡잎이 예쁘게 돋아난 것이 신기해서 모조리 뽑아 아버지께 자랑을 했더니 청천벽력과 함께 목덜미가 잡혀 내동댕이쳐져 까무러친 것을 누나가 살려냈다고 자랑하는 바람에 알게 됐다. 예쁘다고 뽑은 것은 아버지가 애써 구해온 호박씨가 틔운 떡잎이었다.

또 한번은 마당에서 병아리를 키우던 암탉을 수리가 채가는 바람에 누나는 아버지 혼쭐이 지레 무서워 수리가 채간 암탉을 찾아오겠다고 산을 몇 개나 넘었다가 저녁때가 되어 초주검 상태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옛날의 추억은 이렇게 아름답다. 차는 앞으로 달리는데 나의 추억은 뒤에서 날 붙잡고 떠날 줄을 모른다. 어쩌잔 말인가? 세월은 유구(悠久)하다는데 땅은 십 년 산천이 여덟 번이나 변한 마당이니 무엇인들 온전하게 남아있으랴. 옛것을 찾겠다는 내게 주는 가르침이다.

AI 시대라는데 옛집을 찾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 하지만 해외 생활 반세기에 켜켜이 쌓였던 그리움이라 떨쳐버릴 수가 없다. 군용 탄약고가 들어섰으니 다른 용도로 크게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옛날 집터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때는 내가 디딜 수 있는 땅일 것이다. 쌍(雙)암(岩)리에 군데군데 암자가 들어선 쌍(雙)암(庵)리가 되는 날, 이 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