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 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21대 대선으로 출범한 이재명정부는 대통령의 궐위에 따른 선거였기 때문에 대통령직인수위도 꾸리지 못하고 당선 확정 즉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대통령실 인사를 단행해 참모진을 확정했고, 일부 부처 차관 인사를 통해 행정 공백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대통령은 이어서 국회의 인사청문회 및 동의가 필요한 국무총리와 중앙행정부처 장관 후보자를 지명했다.
이재명정부는 취임 후 지금까지 국무총리를 비롯한 장관으로 8명의 국회의원을 내정했는데 이는 대통령을 제외한 내각 20명 중 40%에 달하는 숫자다. 아직 문화체육부와 국토교통부장관은 내정되지 않은 상태다. 대통령실에도 비서실장, 안보실장, 대변인에 국회의원이 임명됐으며, 국세청장에도 국회의원을 내정했다. 현재까지 이재명정부 인사를 위해 배지를 달고 또는 배지를 반납하고 무려 현직 국회의원 12명이 동원됐다.
우리 헌법 43조는 ‘국회의원은 법률이 정하는 직을 겸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국회법 29조 1항은 ‘의원은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 직 외의 다른 직을 겸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박정희정권의 3선을 가능케 한 1969년 3선개헌안에 포함된 위 두 법조문에 의해 국회의원의 장관 겸직이 마치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국회의원을 국무총리나 국무위원에 임명하는 일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조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다른 쪽에서는 무수한 국회의원들을 내각에 불러들이는 아이러니가 반복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은 삼권분립에 기초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입법, 사법, 행정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고, 상호 독립과 견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돼 있다. 따라서 입법부의 국회의원이 행정부의 국무총리나 국무위원을 겸직하는 일은 삼권분립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다. 현행 헌법 43조와 국회법 29조 1항을 근거로 합법성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1969년 3선개헌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 43조 자체가 삼권분립의 기본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도 1995년 ‘선고 91헌마67’에서 ‘겸직금지의 입법취지는 법률의 집행공직자가 의원겸직을 통하여 행정의 통제자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이로써 이해충돌의 위험성을 방지하자는 것으로서, 입법과 행정간의 권력분립이라는 헌법상의 원칙을 유지하고 실현시키는 데 있다’라고 판시하고 있다.
실제로 의원내각제를 시행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수상 또는 총리를 비롯한 내각 대부분을 국회의원으로 구성하고 있지만 수상 또는 장관이 의원직을 겸하는 것은 아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선거를 채택하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는 수상 또는 장관직을 수행해야 하는 경우 당연히 의원의 임무를 내려놓으며, 그 임무는 같은 선거에서 선출된 부의원(副議員)이 독립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수상 또는 장관직에서 물러나면 그동안 부의원이 수행했던 의정활동은 다시 정의원의 몫이 된다. 내각제를 실시하고 있는 베네룩스 3국이나 그리스에서는 국회의원의 장관 겸직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삼권분립의 원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국회의원의 장관 겸직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다. 국회의원 또는 장관의 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초인적 노력이 필요하며 하루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막대한 양의 업무를 소화해야 한다. 따라서 국회의원 또는 장관 중 하나만 수행하기에도 버거운데 두 가지를 한 사람이 해낸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염치없는 일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 상식이 있고 조그만큼의 염치가 있다면 국회의원을 빼내 내각을 구성하는 일도, 또 장관직 제의에 1초 망설임도 없이 덥석 물어버리는 일도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헌법과 관련 법률을 손보아야 한다. 1969년 3선개헌 때 만들어진 해괴한 법조문인데 부끄럽지도 않은가?
염치(廉恥)가 없는 정치(政治)는 수치(羞恥)이며, 수치스러운 정치는 국민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정치에는 염치가 있어야 하며 정치인은 염치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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