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자 수필가
6월 초에 충주문화답사팀을 따라 청송엘 다녀왔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는 참혹했다. 산에 나무들은 선 채로 죽었고, 돼지들이 떼죽음을 당한 돈사는 휘어진 철골만 앙상했으며 화학제품에서 뿜어나온 검은 가스가 남긴 흉터가 볼썽사나웠다.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부에서 대여해준 열 평짜리 컨테이너 하우스를 보금자리로 삼고 옹색함을 견디며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농촌의 실정은 어느 곳이나 비슷하다. 농사를 짓는 이들 대다수가 노인들이다. 평생 악바리로 농사를 지어도 공장에서 받는 한 달 치 월급에 비하면 농산물값은 형편없다. 평생 제자리걸음만 치는 농사를 자식들에게 대물림시키지 않으려고 공부시켜 외지로 내보낸 터였다.
외롭게 남은 노인들에게 산불은 날벼락이었다. 밥그릇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몸만 빠져나왔다. 집과 손때 묻은 살림을 몽땅 잃었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날이 새면 밥을 짓고, 아침 밥을 먹고 나면 호미를 쥐고 밭으로 나가 감자와 고구마를 심고, 참깨도 심고, 고추도 심어 지주대까지 깔축없이 세워 놓았다.
답사팀을 태운 차가 첫 코스로 잡힌 수정사란 암자로 들어섰다.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절이다. 하지만 절도 화마를 피하지 못해 대웅전과 산신각만 남고 나머지 건물은 전소되었다. 요사채가 있던 터에서 대형 포클레인이 들어와 굉음을 울리며 전소된 잔해를 정리하고 있었다.
회원들이 대웅전으로 들어간 사이에 나는 산신각 쪽으로 올라가 수정사를 둘러싼 산을 둘러봤다. 검게 탄 나무들의 도열이 유령들처럼 보였다. 검은 유령들 사이에서 녹색 풀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새들도 떠나가고, 네 발 달린 동물들도 멀리 달아난 적막한 산중에 우리들은 돌아왔노라고 푸른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흙의 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덩어리가 땅으로 떨어지고 품에서 풀들이 아우성을 칠 때, 흙인들 어찌 화상을 입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비가 몇 번 내린 것으로 흙은 다시 소생하여 품속에 숨겨둔 씨앗에 숨결을 불어 넣어 나붓나붓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농민이 왜 민초로 불리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백성 민(民) 자에 풀 초(草) 자를 쓴 건, 농민들은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쳐도 삶의 끈을 놓지 않는다. 바람 불면 바람 부는 쪽으로 몸을 눕히고,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생존의 유연성과 끈질김이 저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녹색 풀과 닮아 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답사팀 40명을 안내하던 해설사는 죽은 나무들이 워낙 많아 베어낼 인력도 부족하지만 죽은 나무를 처치하는 게 더 어려워 그냥 내처 두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자연치유는 옳은 판단이다. 나는 흙을 믿는다. 흙은 오랜 세월 식물들의 왕국이었다. 손실된 식물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흙은 보다 조급하게 품속에서 간직한 온갖 수종의 씨앗들을 발화시킬 것이다. 그러면 풀들은 광합성을 흡수하는 세포 활동이 더 왕성해질 테다. 새순이 잎이 되고 줄기가 가지가 되는 동안 멀리 달아난 짐승들도 돌아와 새끼를 치고 새들도 둥지를 틀 것이다.
도종환 시인도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고, 화산재에 덮히고 용암이 녹은 산기슭에서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고 했다. 그게 살아 있는 생명들의 근성이며 운동 역학이다.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결같은 생명의 근성에 성호를 그어 화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