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윤 수필가
여름휴가 날짜를 정했다. 대개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이 제안하면 그대로 하는 편이다. 일 중독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부부는 노는 일에 서툴다. 자연히 이제까지의 휴가는 잠시 일을 내려놓고 쉬는 개념이었다고 할 것이다.
상의 끝에 이번 휴가도 그저 쉬어가는 휴가로만 지내기로 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느라 시간에 쫓기던 딸아이도 반색한다. 우리 가족 모두 더위에 특히 취약한 것도 이유가 되었을 거다. 게다가 이웃 개에게 물린 상처가 다 낫지 않은 반려견도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작년 여름처럼 휴가 동안 안과며 치과 등 병원을 돌며 검진받기로 했다. 그런데 남편이 뜻밖의 제안을 한다. 깜박하는 증세가 부쩍 심하니 이때 한번 검사를 받아보는 게 어떠냐고. 자주 물건을 두고 출근해서 난감해하기도 하고 현관문 잠금 번호를 잊어버려서 곤란했던 적도 있어서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한번 펼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도 요즘은 오래 붙들고 있기가 쉽지 않아 불편했다. 집중력이 전보다 확연히 떨어진 느낌이어서 친한 친구에게 미리 상의하기도 했다. 워낙 바쁘게 사는 탓도 나이 탓도 있다며 친구는 일을 줄이고 수면시간을 늘려보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간신히 여섯 시간으로 늘려놓았던 수면시간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며칠 전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핑계로 시간이 없다던 한 초등학생이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라고 물어보니 잠을 줄여서 해오겠다는 것이다. 아이의 일과를 함께 살펴보면서 나의 하루도 돌아보니 나야말로 잠을 줄여가며 일하고 있었다. 사실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면 가장 먼저 잠을 줄이는 것이 오랜 습관이었다. 사당오락(四當五落)이니 하는 말이 흔했던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이가 어렸을 땐 출근 전 집안 살림을 해놓았고 아이가 잠든 후에도 약간의 집안일과 집으로 가져온 일을 해야만 했다. 자기 계발한답시고 책상 앞에 앉으려면 하루 서너 시간의 수면도 감수해야 했던 시절이다. 이제 아이는 성인이 되었고 생업에선 한 발짝 떼어놓았으니 여유로워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무언가에 쫓긴다. 주말이나 휴가 때면 벼르던 책을 탑처럼 쌓아놓고 읽는 것이 낭만이었던 것이 요즘엔 뭉근하게 조여오는 과제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어쩌면 내 머리에도 과부하가 걸렸던 건지 모르겠다.
물건을 버리지 못해 정리가 어려운 성격에 내 공간엔 여유가 없다. 공간뿐 아니라 시간에도 나는 비움을 못하는 모양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낭비 같았다. 심지어 몸이 아파 일을 못 할 때면 죄책감에 시달렸던 기억도 떠올랐다. 시간을 비우는 것이 곧 시간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득 채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간을 비우는 것은 유의미한 채움을 위해서라기보다 본질적으로 있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숨을 들이마시기도 하지만 당연히 내쉬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정지하고 멈추는 것처럼. 어떤 결과를 위해 달려나가는 시간들 사이로 듬성듬성 시간을 비우기도 휴가처럼 한 무더기 비우기도 해야 한다. 그 비어있는 시간 속에서 아무런 욕망도 없이 그저 자유로운 영혼으로 떠 있는 그것. 그것이 내게는 필요하다고 내 몸이 속삭이는 것 같다.
휴가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병원에 다녀왔다. 다행히 의사도 충분한 수면과 일을 줄일 것을 권고했다. 이제 나는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텅 빈 시간에 몸을 맡길 것이다. 일정표가 텅텅 비어있는 여름휴가가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