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보다 생명에 우선 가치
◆ 김창룡 특무대장 살해사건 맡아
국회 국방위원장으로서 안동준이 처리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김창룡 특무대장 살해사건과 관련된 도진희 국회의원의 구속 문제였다. 또 병역법 개정에도 힘을 기울여 1957년 7월 31일 개정안이 통과됐다.
도진희 의원의 구속 문제는 고희두의 ‘이중간첩’ 사건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었다.
고희두는 동대문구 일대에서 지역 유지로 통하는 재력가로, 동대문 경찰서 후원회장, 사법보호위원회 회장 등 여러 감투를 쓰고 있었다.
그런 그가 1949년 9월 27일 간첩혐의를 받고 특무대에 잡혀들어와 조사를 받다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고희두를 조사한 담당 수사관이 도진희 상사였다. 조사 결과 고희두는 동대문 일대 여러 곳에 아지트를 정해놓고 동대문 시장 상인들의 돈을 갹출해 경찰서에는 방범비로 지원하고 공산당원들에게는 공작금으로 지원하는 이중간첩 생활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사람이 죽고보니, 평소에 방첩대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 같은 수사기관들도 특무대에 대해 좋지않은 평을 하게 됐다.
그러자 채병덕 육군총장이 재조사 지시를 내렸다.
베테랑 수사관들을 붙여 도진희 상사를 조사했지만 그는 자신의 혐의에 대해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부검결과 사망원인이 급성심장마비로 판명됐다. 도진희 상사는 업무상 과실치사혐의가 적용돼 징역 9년이 선고되고, 김창룡 특무대장은 문책성 인사로 공군본부로 전속됐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이 사건은 흐지부지돼, 도진희 상사는 석방됐으며, 김창룡 특무대장도 원복돼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 도진희 구속동의안 가결시켜
세월이 지나 도진희 상사는 1954년 5월 20일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진 건 김창룡 특무대장이 1956년 1월 13일 출근길에 죽음을 당하면서 부터였다. 김창룡의 죽음을 계기로 고희두 가족들이 고희두의 고문치사 사건을 다시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각 언론기관에 “고희두는 간첩이 아니며 고문에 의한 치사이므로 다시 조사를 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언론기관이 진상을 규명하겠다며 나서자, 공안당국에서는 급속도로 재조사를 실시해 1956년 3월 2일 이승만 대통령 명의로 된 ‘도진희 의원 구속동의 요구안’을 국회로 넘겼다.
국회에서는 재석의원 160명 중 찬성 99표, 반대 52표, 기권 5표, 무효 4표로 구속동의안이 가결됐다.
도진희 의원은 다시 재판정에 서게 됐으며, 재수감돼 1년 3개월 23일간을 더 복역하게 됐다.
그 당시 이를 주관했던 인물이 국방위원장이었던 안동준이었다.
결과적으로 안동준은 반공 이데올로기 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 순위에 두었던 셈이다.
◆ 막강한 권력 휘두른 김창룡
김창룡 특무대장 살해사건은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엄청난 이슈였다.
김창룡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인 특무대 대장을 맡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 관동군의 헌병 소속으로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하다가 광복 이후에도 출세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고향인 영흥으로 돌아왔다. 이때 영흥에서 소련군에게 친일부역 혐의로 체포당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고 이후 다른 지역을 전전하다 다시 친일 혐의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거듭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는 38선을 넘어 월남해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도 그는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해 전전하던 중 마침 만주군에서 안면이 있던 박기병을 만나 국방경비대 5연대 일반 사병으로 입대했다.
사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3연대에서 정보하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만주군 대위 출신인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 3기로 입교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