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 소설가
선생님은 교과서 첫 장에 있는 그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통째로 외운 다음 맨 아래 발표 날짜와 박정희 대통령 친필사인까지 머리에 쏙쏙 집어넣으라고 하셨다.
“못 외우먼 집에 안 보내. 암송 순서대로 집에 보낼 테니 그때까지는 꼼짝 마.”
4학년 이상 상급반 모두 그렇게 개구리 합창처럼 재갈재갈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대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에서부터 마지막 문장 ‘새역사를 창조하자’까지 ‘통째로 외우기’를 시도했다. 뜻도 모른 채 ‘좔좔 소리내다 보면 결국은 외워진다’는 습관의 연장이다. 그렇게 구구단이나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웠고 심지어 ‘하늘천天 따지地 검을현玄 누르황黃’ 같은 천자문에도 도전한 동무도 있다.
소년 혼자만 생각이 달랐다. 통째로 외우는 건 여차하면 통째로 날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나씩 조근조근 짚어나가야 중간에서 막히더라도 의미추적이 가능해서 다음 문장이 살아난다는 게 그동안의 경험이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서 훈민정음이나 팔만대장경 같은 업적을 연상하면서 ‘조상의 빛난 얼’을 떠올릴 작정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잠 잘 자는 우리 아기’와 연결되어 ‘옥수수가 잘도 크듯’ 문장의 의미끼리 생각주머니로 연결하는 것이다. ‘원숭이 볼기짝은 빨개’에서 ‘빨가면 사과’와 ‘사과는 맛있어’가 ‘맛있으면 바나나’로 직통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마침내 소년이 가장 먼저 교탁 앞으로 나서는 것이다. 스승께서 눈을 동그랗게 뜨시더니.
“벌써 끝났어?”
나올 때는 용감했지만 스승 앞에 서기만 하면 모기 소리모냥 앵앵 기어드는 이유도 스스로 잘 안다. 고개를 조아리자.
“해봣. 남자답게 어깨를 쫘악 펴고.”
원래 ‘남자는 배짱 여자는 절개’를 강조하시던 스승님이다. 가슴을 토닥이던 소년이 용기를 내어 외우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줄기찬 노력으로 새역사를 창조하자.”
까지 더듬더듬 완성을 시켰다. 스승께서는 조금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합격! 집에 그아라.”
동만이와 용자, 순임이 같은 애들도 암송 검사의 줄에 설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월말고사에서 순임이가 1등, 순구가 3등, 소년은8등을 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줄을 서려는 종식이와 순구는 한머리 한동네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손짓했는데도 멀뚱멀뚱 서 있자.
“왜 안가? 가라니까.”
소년이 아까보다 더 빨개진 볼을 만지작거리며.
“이게 틀린 거라서……유.”
그 순간 교실 전체가 고요에 빠지면서 가슴에서 두근두근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소년이 벌벌 떨며 가리킨 부분은 둘째 문단의 둘째 줄 ‘저마다 타고난 소질을 개발하고’의 문장이다. 소년의 고개가 교탁까지 내려오자.
“큰소리로 얘기하라고. 사내대장부가 왜 비겁자처럼 눈빛을 피해?”
스승의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 때문이라고 고개를 돌린 거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 대신 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개발’이 아니라……‘계발’인디유.”
“그게 무슨 개발새발 같은 소리냐? 뚱딴지 같은 얘기네.”
그럴수록 목소리가 쥐구멍으로 기어 들어가면서.
“개발은 국토개발처럼 물질적인 거구유, 계발은 정신적인 걸 창조허능 건디유.”
스승께서 ‘어럽쇼’ 하는 난감한 표정을 재빨리 지우며.
“알았으니 집에 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소년이 움직이지 못하고 쩔쩔매는 표정이어서.
“왜 안가? 합격이라니까.”
소년이 아까보다 더 울멍울멍 표정으로.
“‘개발새발’이 아니라 ‘괴발개발’인데유. 개랑 새의 발자국이 아니라 개랑 고양이 발자국이라구 『소년중앙』에 나와 있던디유.”
스승께서 푸우, 한숨을 쉬시며 분필 토막을 만지막거리다가.
“알았으니 그만 집에 가그라. 니가 1등으로 가는 거여.”
그렇게 두 번째 정답을 듣지 못한 채 혼자만 교실문을 빠져나왔다. 그래봤자 한머리까지 30분 하굣길을 혼자 가는 건 너무 심심하므로 철봉대 앞에서 동무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은 울타리 너머 보리밭에서 깜부기 대궁 잘라 보리피리나 불참이다. 저만치 5학년 교실에서 대밭집 종식이이와 순구가 나오는 걸 보면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이젠 됐다. 삼총사가 함께 책보를 던져놓고 적돌만 갯벌에서 박하지나 잡다가 집에는 느즈막히 갈 참이다. 시간이야 어떻게 되든 나는 모른다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