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자 수필가
해파리냉채는 우리 가족이 즐기는 여름철 별미다. 소금에 절인 해파리를 열 번쯤 찬물에 헹군 다음에 70도 정도 더운물에 살짝 데친다. 물이 너무 뜨거우면 해파리가 오그라들고 질기다.
이렇게 준비된 해파리에 오이와 파프리카와 배를 채 썰어 섞는다. 그런 다음에 마늘 간 것과 겨자, 식초와 꿀을 넣고 버무리면 새콤달콤 매콤한 맛까지 어울려 혀에 감친다.
식초는 이렇게 여름철 음식에 빠질 수 없는 식재료다. 식초엔 유기산과 초산 성분이 풍부하다. 이 성분은 식물에 들어 있는 필수 아미노산과 칼슘과 미네랄 손실을 막아준다. 게다가 맵고 짠 음식에 들어가면 순한 맛으로 바꾸어 놓는다.
특히 여름철에 주로 먹는 미역냉국이나 오이냉채에 식초 몇 방울만 떨어뜨리면 상큼한 맛이 더위를 잊게 해준다. 또 입안을 톡 쏘는 비빔냉면은 식초와 설탕과 고춧가루와 깨소금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 낸 종합작품이다. 이래서 식초는 간장과 함께 수백 년 동안 장수를 누려왔고 앞으로도 식재료 중에서 장군 역할을 톡톡히 해 낼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엔 식초를 집에서 만들어 썼다. 곡물을 시루에 찌거나 과일을 썰어 항아리에 넣고 누룩으로 빚은 술을 부어 초산이 될 때까지 1년 정도 기다리면, 곡물과 과일이 잘 발효되어 노르스름한 빛깔을 띤 식초의 원액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창호지로 항아리 주둥아리를 정갈하게 싸고 뚜껑을 덮어 부뚜막 안쪽에 올려놓았던 식초 항아리는 조왕신과 비등점을 같이 두었다. 고사를 지내고 나면 장독대 다음으로 식초 항아리 앞에도 떡 접시를 놓고 비손을 했다. 식초 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 하여 신주단지로 모셨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양조식초가 쏟아져나와 손쉽게 식초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석유산업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설탕과 함께 등장한 식초는 식품업계에 새로운 스타로 부상했다. 이로써 부뚜막에서 조왕신과 비등하게 대접받았던 초항아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자연산 먹거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현대인들이 아무리 디지털정보를 외쳐도 풋감과 풋과일을 발효시키는 항아리가 즐비하다. 나 역시 간장과 고추장은 내 손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과 같은 까닭일 터이다.
일상에 길들인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 짠맛을 흔히 오미(五味)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재료는 서로 어울리어야 제맛을 낸다, 그렇지 않으면 저마다 독불장군일 뿐이다.
음식을 만들 때 가끔 옛날 고승들이 맛보던 정미(正味)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정미란 밥상을 받고 먼저 간 없이 맨밥 세 수저를 먹는 것을 말하는 데, 첫 번째 수저는 비와 햇볕을 내려준 천지신명께 드리는 감사의 예다. 두 번째는 농사를 지은 이에게 보내는 치하다. 세 번째 수저는 밥을 지어준 공양주에게 보내는 고마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 수저의 맨밥을 씹는 동안 침으로 용해되는 밥맛이 그럴 수 없이 담백하다는 점이다. 조미되지 않은 맨밥만 낼 수 있는 순전한 맛을 ‘정미’라 하였다.
'도'란 이렇듯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일상에서 수시로 접하는 사물의 본질에서 ‘참’을 찾고, 고마움을 느끼고, 어울림의 미덕을 존중할 줄 알면 된다. 저녁엔 나도 맨밥 세 수저를 먹고, 남편과 해파리냉채를 안주 삼아 맥주 한 캔 마셔볼 작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