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권 제한’ 의원직 박탈… 오뚝이 같은 삶

▲ 국회 예산결산위원장 시절의 안동준이 ‘건설 공무원의 자세’를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 실의에 빠져 백화산 흰드뫼로
의회로 돌아온 안동준은 1960년 9월 26일 중요농산물적정가격보장법안을 제출하는 등 의욕적으로 의정활동에 임했다. 이 법안의 골자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요농산물적정가격보장위원회를 설치하고 주요 농산물에 대해 생산비와 적정 이윤을 합한 기준 가격을 책정해 정부에서 등락을 조절하도록 한 것이었다. 안동준의 소속 상임위는 농림위원회였다. 농림위는 농민의 아들인 안동준에겐 몸에 맞는 옷과 같았다. 의욕이 솟았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랄까, 5대 의원으로서 안동준의 활동은 길지 않았다.
12월 31일 통과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의원직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중앙위원이었던 안동준은 제5조 2항에 해당됐다.
법 규정에는 현직 국회의원의 경우 국회에 공민권제한심사위원회를 설치해 심사를 하도록 돼 있었다. 대상자는 안동준을 포함해 민의원 14명과 참의원 14명 등 모두 28명이었다. 안동준은 1961년 3월 7일 송능운, 김대식, 송관수 등과 함께 1차로 5년 동안의 ‘공민권 제한’ 판정을 받았다.
이렇게 반년 남짓한 안동준의 두 번째 의원 생활은 막을 내렸다. 참 ‘파도’가 많은 삶이었다.
실의에 빠진 안동준은 홀로 문경의 백화산 아래 흰드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소를 키우며 세월을 낚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곧 기회가 찾아왔다.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였다. 이기붕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첫발을 디뎠던 안동준은, 오히려 이 일로 인해 군 경험과 재선 의원이라는 타이틀을 배경으로 다시 한번 정계의 중심에 복귀할 기회를 얻게 됐다.

◆ 정치적 시련 이기고 6대 의원 당선
군사정부는 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해 구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안동준은 제3조 1항 3호, 즉 5대 국회의원직에 있던 자에 해당돼 또다시 정치활동을 차단당했다. 그가 해금된 것은 1963년 2월 1일이었다.
안동준은 정부 수립과 함께 군문에 들어갔지만 군 생활 동안 쿠데타 주체세력과의 인연은 깊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 7기 특별반으로 입교했을 때 중대장이 박정희였지만 훈련 중 발생한 사고로 곧 교체돼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다.
다만 1963년 1월 20일 쿠데타의 주역인 장경순이 주도해 학병 출신들의 모임인 ‘1・20동지회’를 결성했는데, 안동준도 연락을 받고 결성식에 참석했던 적은 있었다.
이 자리에는 박정희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안동준의 정치활동 재개가 직접적으로 쿠데타 세력을 매개로 한 것은 아니다.
정치활동 금지에서 풀려나자 안동준은 5대 국회에 진출했던 자유당계 인사들과 함께 여러 가지 방향에서 향후 진로를 모색했다.
공화당 측과 입당 문제를 협의하기도 하고 변영태와 이범석의 합작을 통한 제3정당 결성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안동준은 6월 10일 개최된 범국민당 발기준비위원회에 참여해 기획위원 겸 섭외부장에 선임됐다. 범국민당은 4・8 성명 후 박정희가 범국민정당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는데, 구 자유당계와 전 민주당계, 민정당계 일부가 참여했고 그 배후에는 최고회의와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있었다.
이들은 공화당을 대신해 여당이 될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범국민당은 6월 15일 당명을 자유민주당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발당 후 박정희가 자유민주당과 공화당의 통합을 종용하면서 자유민주당 내부는 통합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었다. 안동준은 통합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엄민영 등과 친여세력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공화당과의 통합 협상에 나섰다. 그리고 8월 5일 공화당에 입당했다.
안동준은 입당 직후 선거대책위원과 정책위원으로 선출됐고 괴산지구당을 맡았다. 그리고 1963년 11월 26일 실시된 6대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의 김사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안동준은 공화당 당이념연구발전위원장에 임명되는 한편 국회 재경위원회에 배정됐다.

◆ 농업분야에 집중된 관심 보여
6대 국회에서 안동준의 관심은 5대 때와 마찬가지로 농업 분야에 집중됐다. 농민의 자식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964년 2월 농업기본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농업 생산과 농산물 가격・유통, 농업구조 개선, 농업 행정기관과 농업 단체, 농정심의회 등 농업과 관련한 광범위한 분야를 규정한 일종의 농업 헌장이었다. 목표는 농업 생산 증강과 농민의 경제적 지위 향상, 농촌 근대화 촉진이었다.
이 법안은 이후 제출된 농림부안과 공화당 정책위원회안을 종합해 단일안으로 정리돼 1966년 12월 2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또 1966년 4월 농산물가격안정기금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대일청구권자금 등을 활용해 농협중앙회에 농산물 가격 안정기금을 설치하는 내용이었다. 이 법안 역시 기금 관리 기관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등 일부 조항을 수정해 1966년 7월 15일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이 외에도 안동준은 자전거 타기를 장려하는 법률안(1964년 5월), 국기 및 국가(國歌)에 관한 법률안(1965년 12월), 도로사업특별회계법안(1966년 2월) 등을 대표 발의했다.
국기 및 국가에 대한 법률안은 현재 사용하는 태극기를 그대로 국기로 하고 국가는 법 시행 후 5년 내에 제정하되 그전까지는 애국가를 사용하도록 한 것이었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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