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순 문학평론가

▲김묘순 문학평론가
▲김묘순 문학평론가

깜밥!
향토사 관장이 돌솥밥을 밥공기에 덜고 물을 붓지 않는다. 그러면 ‘깡개’가 된단다. 아닌 게 아니라 밥을 다 먹고 나니 ‘깜밥’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은 ‘깜밥’이라 했다. 그랬더니 이 관장은 그것을 ‘깡개’라 한단다.

‘깜밥’이나 ‘깡개’나…. 지나가는 강아지를 ‘강생이’라 불러야 한다거나 ‘갱아지’라 불러야 한다고 한 판 입씨름을 벌이는 경로당 노인들 풍경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국어사전(우리말샘과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에는 어떻게 등재되어 있는지 궁금하였다.

‘깜밥’은 ‘눌은밥’의 방언(강원, 전라, 충남)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깡개’는 ‘누룽지’의 방언(충남)이라 쓰여있다. 아, 나는 전북이 고향이니 ‘깜밥’이라 쓰고, 향토사 관장은 충남이 고향이니 ‘깡개’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나 보다.

‘눌은밥’은 솥이나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밥에 물을 부어 불려서 긁은 밥이란다.

‘누룽지¹’는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이라며 ‘눋-’에 접미사 ‘-웅지’가 붙은 말이며, 15세기부터 현대에 이어져 왔다며 ‘눋-’은 모음 앞에서 ‘ㄷ’이 ‘ㄹ’로 바뀌는 ‘ㄷ’불규칙용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누룽지²’는 (1. ‘눌은밥’의 비표준어, 2. 눌은밥(솥이나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밥에 물을 부어 불려서 긁은 밥)으로 기록하며 표준어는 ‘눌은밥’이라 한단다.

‘누룽지’인지 ‘눌은밥’인지 사전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는 있다. 또 쓰는 지역마다 혹은 쓰는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의 영향으로 ‘깜밥’이나 ‘깡개’로 쓰이며 정감을 더하고 있다.

‘눌은밥’은 물을 부어 숭늉과 함께 먹던 형태를, ‘깜밥’은 솥 바닥에 눌어붙었던 밥을 긁어모았던 바삭하고 고소한 맛을 내던 것을 의미하였다. 나는 물을 부었느냐 안 부었느냐에 따라 ‘눌은밥’과 ‘깜밥’을 명확히 구분하여 썼는데….

‘깜밥’이면 어떻고 ‘깡개’면 어떠한가. 언어의 목표인 원활한 의사소통만 되면 그만이지 아니한가.

‘깜밥’은 어느새 40-50여 년 전 할머니를 소환하였다.
할머니는 ‘깜밥’을 숨겼다.
도시에서 자취하며 공부하는 손녀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깜밥’을 내놓는다. 새카맣게 탄 ‘깜밥’이다. 할머니께서 손녀 생각하며 대나무 채반에 널어 며칠을 담장 위에 얹었다 내리기를 반복하였을까. 몸도 성치 않으신데….

할머니는 지켜보셨다.
‘깜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손녀 생각하며 잘 말려서 손 안 타는 곳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깜밥’. 그것은 손녀를 보고 싶어 애간장을 녹인 것을, 닮았는지 새카맣게 탄 것이었다.

참 난처하였다. 탄 것을 먹자니 그렇고 안 먹자니 할머니께서 매우 서운해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칼로 까맣게 탄 부분을 박박 긁어냈다. 숯검정처럼 우수수 까만 입자들이 부서져 내렸다. 그 속에서 갈색의 노릇노릇한 ‘깜밥’이 얼굴을 내밀었다. 반가웠다. 바삭거리며 입에 앵기는 맛이 참 달았다. 할머니는 그렇게 달게 먹는 손녀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올리셨다.

‘깜밥’이 까맣게 타서 ‘깜밥’이 아니었다.
담장을 오르내리며 말리고 한지에 여러 겹 싸서 벽장에 보관하며 손녀를 기다렸을 할머니. 그의 정성과 기다림이 모여 ‘깜밥’을 만들었고 그 진실한 온갖 마음이 모여 단맛을 내게 한 것은 아닐까.

방학 무렵이면, 모시옷 입고 안방 마루에 앉아, 대문을 바라보며 애타게 손녀를 기다렸던 할머니. 그가 무척 보고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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