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구 바이오톡스텍 대표·충북대 수의대 명예교수

▲ 강종구 바이오톡스텍 대표·충북대 수의대 명예교수

일본은 자판기 천국으로 전국에 약 400만대 자판기가 있고 이를 통한 매출은 연 50조원에 이른다. 일본의 자판기는 기술과 창의력 그리고 소비자의 욕구가 결합 된 기기로 독특한 문화를 체험하게 한다. 자판기는 거의 모든 것을 파는데 인건비, 임대비, 보관료를 절약해 수익을 내는 만능 상점이다. 일본에 자판기가 많은 이유는 치안이 좋아 어디에 설치해도 도난 위험이 없고 싼 것 하나로 점원에 민폐를 끼치지 않고 비대면으로 바로 구매할 수 있는 장점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은 현금 기반 사회로 8% 소비세로 인한 잔돈과 더치페이 문화로 동전이 넘쳐나는데 자판기는 유용한 동전 처리기이다.

일본에 가면 놀라는 것은 파친코 점 앞에 아침 일찍부터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길게 선 행렬이다. 파친코는 작은 쇠 구술을 구멍에 넣어 점수를 얻는 레저 오락으로 거리에서 가장 화려하고 밤늦게까지 불야성인 건물은 거의 파친코 점이다. 일본은 파친코 왕국으로 파친코 산업은 레저 시장의 1/3을 점유하는 가장 인기 있는 산업으로 연 매출 약 140조원, 약 7천개 점포, 이용객은 천만 명이 넘는다. 파친코는 조용한 일본인에게 소란하고 부산한 분위기 속에서 민폐없이 일상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금전적 사행심까지 충족시켜주는 대중 도박성 게임이다. 하지만 도박중독에 의한 빚과 가정불화로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필자는 유학 시절, 한 달에 1회 호기심과 사행심으로 천엔 한도로 파친코를 했었다. 돈과 바꾼 구술을 기계에 넣어 구슬이 구멍에 들어가도록 손잡이를 돌리다 운 좋게 연속 구멍에 들어가 구슬이 폭포처럼 쏟아지면 박스에 가득 담아 현금과 교환했다. 가끔 행운인지 가난한 유학생에 대한 적선인지 1년에 3~4번은 20~40배 돈을 벌어 큰 보탬이 되었다. 파친코를 하는 사람들은 야쿠자나 건달이 아니라 평범한 서민들이었다. 어느 날 파친코 점에 갔을 때 한쪽 구석에 지도교수를 보고 기겁해 도망쳐 나왔다. 위엄있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교수가 파친코에 몰입하는 광경이 충격이라 대학원생에게 물어보니 간혹 파친코 점에서 교수를 봤다 해서 파친코는 동경대 교수도 즐기는 대중 레저 오락인 것을 알았다.

2017년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라는 소설이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4대에 걸쳐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 겪는 처절한 삶을 그린 감동적 소설이다. 일본에서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재일한국인에게 편견, 비하와 차별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삶의 굴레로 파친코는 단순 게임이 아닌 차별과 생존, 정체성의 상징으로 살아남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의지이며 역사였다. 주인공의 아들로 파친코로 성공한 모자수는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는 파친코에 고객들이 빠져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하였다. ‘파친코’ 소설처럼 일본인은 파친코를 사행사업, 조선도박이라 천시해 재일한국인이 대거 진출해 부를 쌓았다. 일본 최대 파친코 회사인 마루한 그룹 창업주, ‘파친코의 왕’ 재일한국인 한창우 회장은 파친코를 통해 성공한 이민자 기업가로 도전정신의 상징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일본 어린이 방송에서 “송사리 형제가 크면 무엇이 될까? 고래가 될까? 잉어(고이)가 될까? 아니야~송사리는 커서도 송사리”라는 동요가 인기였다. 방송을 보고 필자는 섬뜩했는데 일본인은 모두 너무 귀엽다고 했다. 한국 청년들은 “미꾸라지 용 됐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도 꿈을 가져 보지만 오늘날 일본의 2030 청년들은 미꾸라지가 용이 될 계층상승의 희망은 사라지고 일할 의지조차 없어 암담해한다. 잉어는 작은 어항에서는 5~8cm 자라지만 큰 연못이나 수족관에 넣으면 15~25cm까지 자라고 강물에서는 90~120cm까지 자란다. 꿈은 클수록 좋고 꿈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송사리 형제’ 동요처럼 일본 계층사회에서 영원히 송사리로 살아갈 재일한국인에게 파친코 사업은 어항 아닌 연못의 잉어라도 되기 위한 돌파구이자 부 축적에 가장 적합한 사업이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했다. 이제 경제 강국, 기술 강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의 글로벌 역량과 경쟁력은 파친코 소설 속의 강인한 세 분 어머니이자 아내처럼 어항 속의 잉어를 강물의 힘센 잉어로 키우려 몸부림쳤던 수많은 위대한 우리 어머니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헌신의 덕택이라 생각한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