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족적 남긴 ‘충북의 큰 별’ 스러지다

▲ 안동준은 1991년 계담서원 복원에 착수해 그해 11월 3일 준공했다. 계담서원은 을사사화에 연루돼 처형당한 안명세(安名世)를 배향하기 위해 1824년 창건됐는데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었다.

◆ 민족 얼 되살리는 원구지원 건립
안동준은 역사 연구 뿐만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민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국조전(國祖殿) 건립이었다.
국조전은 민족의 조상을 모시는 전당이다. 안동준이 국조전 건립을 구상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만큼 그는 민족의 자존과 긍지를 어려서부터 키워왔다.
중앙 정치에서 상처를 받고 타의에 의해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는 국조전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국조전에 배향할 대상은 단군은 물론 염제 신농씨 이래 역대 왕조의 군왕과 각 성씨의 시조, 충신・명장・명신・명현과 효자・열녀였다. 안동준은 5년 반에 걸친 연구 조사 끝에 3689인을 선정했다. 그리고 1978년 10월 2~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국조전 모형 전시회를 열었다.
국조전을 건립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민족의 공동 조상과 위인들을 한 자리에 모신 뒤 정기적인 제사를 지내고 국민들이 참배하도록 함으로써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을 강화하고 합심과 결속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안동준의 계획은 2008년 고향인 괴산 감물면 이담리에 원구지원(圓丘之怨)을 건립함으로써 결실을 보았다. 현재 원구지원에는 단군을 비롯해 200여 성씨의 시조 위패가 모셔져 있고 매년 10월 3일 중산아카데미와 괴산군이 공동 주관하는 개천절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또 국조단군추모탑을 비롯해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최익현, 안중근, 김구 선생 등의 추모비, 6・25 전쟁 당시 파견된 16개국의 군 상황비 등이 조성돼 있다.

◆ 종이 한 장 허투루 버리지 않은 컬렉터
안동준은 매우 꼼꼼한 사람이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했다. 종이 한 장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컬렉터로서 안동준이 수집한 것들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매우 유용한 가치를 지닌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방대하고 귀중한 가치를 지닌 ‘안동준 자료’에 대해 정리를 진행했다.
‘안동준 자료’는 유형별로 도서와 문서, 서한・연하장, 청첩장・초청장, 청원・건의서, 이력서, 방명록・인명록・주소록, 영수증, 사진・앨범 등으로 구성돼 있다.
내용으로 분류하면 ①정부 수립 후 군 활동 ② 자유당과 3대 국회 ③5대 국회 ④공화당과 6・7대 국회 ⑤국제관광공사 ⑥충주미덕학원 ⑦증평협업농장 ⑧국회의원동우회 ⑨1・20동지회 ⑩역사 연구와 국조전 건립 ⑪괴산 지역 관련 등이다.

◆ 서예 부문 출중한 실력 가져
안동준은 서예 부문에서도 출중한 실력을 가졌다. 국회의원동우회 안에 서화분과위를 구성하기도 한 그는 동우회 서예전과 1・20동지회 서예전 등에 출품하고 1978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인 서예전을 열었다.
1980년에는 신문회관에서 회갑 기념 개인서화전을, 1983년에는 각 문중의 가훈을 수집해 가훈 서예전을 열었다. 그 후에도 안동준은 꾸준히 서화전을 개최해 서도가로서의 위상을 뚜렷이 했을 뿐만 아니라 서예인의 저변확대에도 힘썼다.
또 1990년에는 우남이승만박사서집발간기념회의 편집위원장을 맡아 감옥잡기를 비롯한 한시, 휘호 등을 수집해 편찬했다.
안동준은 체력적으로 건장한 편은 아니었다. 앞서 간 아내를 추모하는 글에서, “아내는 자신의 병 시중과 약을 달이는 데 일생을 바치다시피 했다”고 애통해할 정도로 마른 체형에 건강은 다소 허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찍부터 요가를 시작해 요가협회 이사를 지냈고 1982년부터는 한국노장마라톤협회 회장직을 맡아 월례 건강마라톤대회를 개최했다. 이 밖에도 일본주오대한국학원회 회장을 역임하고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의 활성화에 애쓰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 계담서원을 복원하다
중산 안동준의 삶에서 마지막 방점을 찍은 것은 고향의 계담서원을 복원한 일이었다.
1969년 <괴산군지> 편찬위원장을 맡아 처음으로 괴산군의 역사를 정리한 바 있는 그는 1991년 순흥안씨 양도공파 회장으로 있으면서 계담서원 복원에 착수했다.
계담서원은 을사사화에 연루돼 처형당한 안명세(安名世)를 배향하기 위해 1824년 창건됐는데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었다.
안동준은 본전인 계담서원 외에 문중 선조의 신위를 모신 세덕사, 학구당, 재실 등을 건립했다. 그리고 안향과 안숭선, 주세붕, 이황, 이이, 김일손, 안명세, 이지함 등 고려・조선시대의 유학자들 뿐 아니라 최익현, 홍범식, 김구, 연병호 등 근현대 인물들도 함께 추배했다.
그는 또 계담서원에 교양대학을 부설해 초대 학장에 취임했는데, 계담서원은 지금까지도 지역 주민들의 평생교육기관으로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와 유학자로서 후학 양성에 힘쓴 안동준은 2010년 숙환으로 영면에 들었다. 향년 91세. 그리고 2015년 계담서원에 추배됐다.
현재 사단법인 중산아카데미가 설립돼 충주미덕학원과 함께 안동준의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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