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윤 수필가
스무 해가 넘도록 묵혀 두었던 면허증을 꺼내 들었다. 살던 읍내에서 조금 멀리 이사를 나가면서 대중교통으로는 출퇴근이 쉽지 않아 운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타고난 길치에 운전도 서툰 나다.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종종 길을 잃곤 해서 운전대를 잡는 일은 늘 긴장이 되었다. 시선은 늘 도로와 표지판, 내비게이션 화면을 오가느라 바빴다.
두어 해가 지나면서 일은 더 많아지고 출퇴근 거리도 더 멀어졌다. 음악을 들으며 차창 밖 풍경을 즐길 여유는커녕 시간에 쫓기기 일쑤였다. 이런저런 짐들을 양손 가득 들고 그저 빨리 도착하기를 빌며 열심히 운전해야 했다. 그래도 제법 운전에 익숙해져 차창 너머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멋진 산의 능선과 맑은 하늘에 시선이 가닿을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늦은 퇴근길의 한산한 도로에서 문득 앞 유리 너머 펼쳐진 밤하늘에 시선을 던지고 깨달았다. 그것은 그냥 단순한 검은 하늘이 아니었다. 층층이 다른 질감과 채도를 지닌 검정이 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깊고 단단한 흑단의 층운과 윤기도는 녹색을 머금은 듯한 검은 층운, 부드러운 회색빛을 머금은 듯한 검은 층운, 짠내가 날 것 같은 짙은 먹빛의 층운. 내가 알고 있는 단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색깔의 층운들이 서로를 보드랍게 껴안으며 완만한 곡선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별도 달도 바람도 숨죽여 자리를 내어준 듯 거대한 구름만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차 안에 앉아 있었지만 광대한 우주의 한가운데 떠 있는 듯한 장엄함에 나는 압도되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땅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땅 위의 문명의 빛은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 작고 하찮게 느껴져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고개를 젖히고 경배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지 않아도 의식은 위로 끝없이 날아올라 지구 밖을 지나 우주를 날고 있는 것만 같았다. 끝을 알 수 없이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은 대우주에서 내려다본 이 하늘과 구름과 그 아래 서 있는 나,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의 존재가 한순간에 와락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릴 적 기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견학 갔던 천문대에서 별자리와 은하를 본 적이 있었다. 천정이 둥근 돔 형태의 거대한 천체투영관에서 별들이 쏟아져내리는 경이로운 광경에 숨이 턱 막혔더랬다. 그 벅찬 감동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내가 매일 무심코 지나쳤던 이 하늘이 그 신비로운 우주라는 것을, 행성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니.
내 몸을 이루는 원소들과 다르지 않은 구름 속 물질들을 떠올리면서 어떤 일체감이 일순간 머리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그 일체감에 가슴이 벅차올라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나는 철저히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슬픔이니 연민이니 하는 것들도 사라져 버렸다. 티끌만 한 나의 존재가 구름이고 우주라니 그 숨결마저 사랑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벅찬 감정에 달떴다. 이것은 무슨 감정일까? 기쁨일까? 그렇다면 왜 기쁜 것이지? 답을 찾진 못했다. 내가 어찌 우주의 신비를 알 수 있겠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쩐지 모든 것이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아파트 단지의 나무도 풀도 정겨웠다. 귀가를 반기는 나의 반려견도 딸아이도, 생명이 깃든 모든 것이 소우주라 생각하니 그저 감동이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달떴던 그 밤 이후로 나는 종종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면 어쩐지 구름 속에 있는 듯 자유롭게 편안한 나를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