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오랜만에 새벽에 서늘함이 느껴져 깨어났다. 옆으로 밀쳐뒀던 얇은 이불을 챙겨 다시 잠을 청하며 이제야 가을인가 하는 반가움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늦더위가 남아 있을 테지만,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까지 지났으니 가을을 막아서진 못할 것이다. 참 더운 여름이었다.
내 유년 시절 더위에 관한 기억은 파편화돼 부분적으로만 떠오른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장례식장의 더위는 장손으로 상복을 입고 상여 앞에 서서 걸으며 느꼈던 서럽고 어리둥절한 느낌으로 남아 있고, 대학 시절 폭압 정권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알 길이 없어 자신을 방기하던 절망의 느낌으로 남아 있다. 가족을 꾸린 후에 처음으로 해외여행으로 나선 태국에서 둘째 아이가 잠이 들어버려 온몸을 땀으로 감싼 채 안고 걸었던 기꺼운 느낌도 있다. 그런 더위들은 모두 어느 순간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고 뒤로 물러서곤 했다.
이번 여름은 내게 삶의 지침을 주신 두 분 선생님을 보내드린 여름으로도 기억될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담임이자 국어 담당이셨던 최충기 선생님과 고등학교에서 시를 가르쳐주신 정양 선생님이 그 두 분이다. 두 분 장례식에 함께하면서 이 두 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에 오래도록 저려오는 가슴을 감당해야 했다. 최 선생님은 면 단위 중학교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셨고, 정 선생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추구하는 목표들을 시적 리듬으로 성찰하지 않을 경우 쉽게 비루해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낭송하시던 기억이 이 아침에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삶은 이렇게 수많은 의존의 산물이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에 의지해 어린 시절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었고, 시골 중학교에서 넓은 세상을 보여주신 선생님에 의지해 그 지역 도청소재지의 오래 역사를 가진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 고등학교에서 시인이시기도 했던 선생님을 만나 지금까지도 과하게 사들이는 시집을 펼치는 기쁨과 함께, 가끔 시흥이 느껴질 때면 끄적거리는 시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대학 이후에도 서양철학을 가르쳐주신 진교훈 선생님과 불교철학과 계율을 가르쳐주신 가산지관스님 같은 스승을 만나는 행운이 있어 이렇게나마 학계의 말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분들 모두 이제 피안에 드셨다.
어디 그뿐이랴, 삶의 여러 구비에서 우연히 또는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가 쌓여 오늘 내 삶을 이룬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지도교수로 만나게 된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과의 교류는 내 학자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적 따뜻함과 학문적 엄격함의 조화를 추구한다고 늘 되뇌기는 했지만, 알지 못하는 굽이에서 내게 상처를 입었거나 그 조화의 문턱에서 넘어져 얼굴을 붉혔던 나에 대한 기억을 지닌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룬 가족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갈수록 가족의 소중함이 실감 나고 이제 맞게 될 가을에는 그 소중함에 부응하는 눈길과 손길을 보내고 싶다는 간절함을 가져본다.
지난 여름의 무더위는 폭염과 폭우라는 말로 상징되는 푹력성을 지니고 있다. 그 폭력성의 배후에는 당연히 기후 위기가 있고, 이 위기를 불러온 배경은 석유에너지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 산업체제와 성장만이 살길이라고 맹목적으로 외쳐온 우리 모두의 업보다. 절대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분투에 성공한 우리는 그 성취를 이룬 후에도 지속적인 성장만을 함께 갈망해 왔다. 국가의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을 넘나들기 시작한 후에도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성장 속도를 유지해 가야 한다는 압박을 서로에게 가해 왔다.
이제는 멈춰서 돌아봐야 한다. 무엇을 위한 성장인지를 되돌아봐야 하고, 그것이 정말 잘 살아가는 길을 향하는 행보인지를 함께 모여 의논의 대상으로 삼아봐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로 상징되는 과학기술이 이끄는 삶의 편리함에 무감각적으로 익숙해져 있는 자신의 일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내면적으로 성찰함과 동시에, 공적 담론의 장을 마련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함께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올 여름 더위보다 훨씬 지독한 더위와 지난 겨울 추위보다 더 가혹해진 추위 뿐이다. 문제는 그런 더위와 추위를 그토록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심각해진다.
우리 정치권에서는 거대 양당을 제외한 가치 지향의 정당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기후 위기를 존재 이유로 삼는 정당들이 국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고, 진보적 가치를 내세운 정당들 또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진보당이나 녹색당 같은 진보정당들의 반진보적인 행태도 작용했고 그 지점에서는 그들 자신이 뼈아픈 성찰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적대적 공생 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한 양대 정당의 폭력적인 존재 양상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그 야만적 공생 체제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함께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몸으로 느껴지는 가을의 서늘함이 이런 길로 우리 모두를 인도하는 선선함으로 새겨질 수 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