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자 수필가
처서가 지났건만 한낮의 더위는 여전히 불가마를 연상케 한다. 이럴 땐 책 읽기가 최고다. 책꽂이에서 <난중일기>를 뽑아 들었다. 다섯 번째 읽기다. 처음 <亂中日記>를 손에 넣은 건 1981년 청주에 있는 ‘일성문고’에서다. ‘범우사’에서 문고판으로 출간한 이 책은 글씨가 작고 내리닫이로 편집된 것이었지만 전쟁 중에 장수가 매일 붓을 들고 일기를 썼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상황이 긴급할 땐 한 줄로도 썼고, 병사들과 청어를 잡아 판돈으로 군량미 500섬을 비축했다고 썼다. 군선을 만들면서도 벼농사와 밭농사도 지어 추수철이면 벼와 콩이 820섬에 이르렀고, 겨울철 김장 준비로 열무씨 두되 서 홉을 심었다고도 썼다. 소한에 날씨가 맑고 따뜻해 콩 열 섬으로 메주를 쑤었다는 기록만으로도 나는 장군에게 반하여 연거푸 두 번 읽었다.
다시 2008년에 성균관한림원에 재직하던 노승석 교수가 <난중일기>로 석사와 박사논문을 쓰면서 장군과 관련된 문헌을 샅샅이 찾아 새로운 고증과 오류를 수정하여 <교감완역 난중일기>를 출간하였다. 이 책이 2010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강토를 불바다로 만들어 놓았던 전쟁이다. 일본장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이끄는 20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와 육지로 진격할 때 조선의 육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신립장군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단번에 허물어졌다. 충주를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주변의 사찰을 남김없이 불태웠다. 불을 지르기 전에 그들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들은 빠짐없이 챙겼다. 복장유물은 물론 고려불화 68점 중에 일본으로 건너간 불화만 43점이다.
이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장군이 이순신이다. 임진년(1592) 1월 전라좌수영으로 들어간 첫날부터 일기를 썼다. 칼보다 붓을 먼저 든 장군은 무술년(1598) 11월 17일까지 썼다. 중간에 가토 기요마사의 정보가 거짓된 것을 알고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28일간 옥살이를 하는 동안과, 외지로 출타 중일 때만 빼면 거의 매일 일기를 쓴 셈이다. 그리곤 마침내 노량해전에서 손수 북채를 잡고 지휘하며 일본군을 추격하다 탄환을 맞고 주저앉으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못하게 명하였다.
장군의 전사는 복된 일이었다. 만일 살아남았더라면 전쟁 중에도 권력다툼을 일삼던 파벌 농간으로 또 무슨 죄를 뒤집어썼을지 모른다. 앞서 두 번이나 백의종군이란 굴욕을 당했던 터였기 때문이다. 장군은 몸에 열이 올라 밤새 앓고서도 전선으로 나가야 했다.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도, 아들 면이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어도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오로지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사필생 필생필사必死必生 必生必死'를 좌우명으로 삼았기에 23번 싸움에서 23번을 승리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전쟁이 끝난 뒤 일본으로 돌아가 자손들에게 “내가 제일로 두려워했던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라고 하였을까. 나 또한 그분께서 목숨 바쳐 지켜온 조선에서 백성으로 80년을 훌쩍 살아온 게 황송하여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적마다 고개 깊이 숙여 감읍한다.
창밖엔 아직도 나뭇잎 하나 흔들림 없이 고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