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 소설가

▲ 강병철 소설가

1928년生, 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청 서기로 일할 때는 부석면 최고의 멋쟁이셨으니 그때가 화양연화였다. 신작로에서 가장 먼저 파머를 하셨고 발바닥에서 15센티나 올라가는 치마를 입었던 신여성 패션이었다. 그러나 소학교 훈장과 결혼한 후에는 수십 년 이상 시집살이와 밭일에 매달리시며 엄지손가락이 골무처럼 납작해지셨다.

93세까지 서산 한라비발디에서 혼자 사실 즈음 요양보호사의 보호를 2년 정도 받았다. 코로나19 때 병상에 누운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셨다. 2년을 시달리는 중에 콧줄 식사로 4년을 더 연장하신 게 가장 큰 고통이셨다. 병상 6년 중 콧줄 식사 4년의 고통의 세월을 견디시다가 마침내 편안한 세계로 몸을 옮기셨다. 그 사이에 몸이 수수깡처럼 마르고 나중에는 주삿바늘조차 꽂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심장박동으로 몇 달을 더 견디다가 눈을 감으셨다. 아!

둘째 아들이 너무 잘 울어서 걱정이 많으셨다. 운동회 달리기에서 4등을 해서 공책을 못 타는 바람에 울었고 곁방 사는 염전집 성국이가 던진 돌멩이에 이마가 깨져 피가 흐르던 날도 맞은 애보다 더 크게 울었다. 5학년 첫 시험 때는 반에서 6등을 하고 울었고 청백 계주에서 청군이 지면서 또 우는 바람에 그때마다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1985년 내가 학교에서 해직당했을 때는 우리 집안에서 가장 의연하셨다. 혼자 논산까지 오셔서 하숙 짐을 묶으시고 트럭에 실어 대전까지 날라다 주시며.

“까짓것, 안 되면 나랑 농사짓자.”

그렇게 상처투성이의 내 가슴을 다독다독 달래주셨다. 해직 동지들을 찾아오면 지성을 다해 밥도 차려 주셨다. 쫓겨난 선생을 찾아오는 제자들에게도 밥과 숭늉을 대접하셨다.. 그리고 혼자 집안 청소와 빨래로 아픈 가슴을 문지르셨다.



장례식을 치르고, 다시 49제 첫날,

부석사에 모신 어머니께 첫 안부를 드리고 절밥을 공양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 ‘예산역 → 익산역 →나주역 → 해남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윤선도의 백련재에 도착하였다. 나는 남도의 작가촌에서 택시를 탈 때마다 ‘호출 명함’을 받아내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 더 이상 호출 택시를 부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감나무 꼭대기로 초승달 하나 흐릿한 밤 11시.

네 번째 숙소인 내 방은 불이 꺼져있었고 문고리는 훌러덩 열린 채 일주일 내내 오픈된 자세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석사 제사상에서 가져온 백설기 두 덩이를 먹고 떡이 되어 쓰러졌다. 아, 이제 오래도록 자고 싶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타나신 것이다.

58년 전인가, 서대문구 굴레방다리 지나 북아현동 고갯길에서 진신주에 기댄 채 보따리 무게를 지탱하던 그 모습 그대로 기다리셨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었지만 여전히 ‘샛별 미인’의 예쁜 얼굴 그대로였다. 그리고 네 번째 골목 아래 내 자취방에서 엄마가 구워주는 가래떡을 먹다가 벌떡 깨었다. 아, 조금 더 잤으면 먹을 수 있었는데.

밤 두 시.

오줌이 마려워 눈을 떴다가 쓰러지자마자 또 나타나셨다. 이번에는 서산군 부석면 대두리 575번지 툇마루이다. 78년 3월이던가, 군軍입대하는 허리 아픈 아들의 징집을 불안해하며 보신탕도 끓이던(보신탕을 드시지 않았지만 요리는 하실 줄 알았다) 아궁이 풍경이다.


‘군대에 갑니다.’

큰절을 올릴 때 억지로 참으시던 ‘엄마의 눈물’이 진하게 재생되었다.



어머니는 관에 들어가시면서 비로소 콧줄을 빼셨고 대번에 존엄한 모습으로 작별의 표정을 보이셨다. 4년 만에 콧줄을 뺀 어머니의 모습이 아, 갑자기 편안해 보였다. 긴 세월 침대에 묶였던 팔도 풀러내면서 마침내 ‘저 푸른 자유의 하늘’로 떠나신 것이다.

이제 벽장 문을 열고 묵은 앨범을 꺼내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 괜찮다. 괜찮다. 그렇게 젊은 여인의 사진을 꺼내어 ‘가래떡 구워주세요’ 훌쩍거리다 보면 해가 뜨고 노을이 저물다가 폭염의 여름이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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