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순 문학평론가
지키지 못하거나 애초부터 지키지 못할 약속이 있다.
아니, 지키려 하였으나 능력이 모자라서 또는 게을러서 영영 어긋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스승의 날 즈음이었다.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이날 언저리에는 지도교수님을 찾아뵙기로 한다. 찾아뵈면 교수님께서는 석‧박사 지도하실 때처럼 걱정을 많이 하신다. 뭔가 똘똘하지 못하고 듬성듬성한 제자가 마음에 안 놓이시는 듯하다.
수업은 어찌 하는지, 건강은 어떠한지, 주변 상황들은 견딜만한지…. 걱정이 담긴 안부를 건네신다.
걱정스러운 안부와 함께 교수님 어깨 너머로 학위 논문 지도받을 때 생각이 어른거린다.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열정적으로 논문 지도를 하시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가까이 다가온다.
그랬다.
동이 트기 전에 집에서 출발해 1시간 30분쯤 운전을 해서 학교에 도착한다. ‘교수님께서 먼저 연구실에 도착하시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이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앞차가 사고를 내서 도로에 서 있다가 늦기도 하고, 허튼 생각을 하다 내려야 하는 나들목을 그냥 지나쳐서 지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수님은 한 번도 역정을 내시지 않으셨다. 항상 연구실에서 무언가 읽고 쓰고 계셨다. 급하게 도착한 모자란 제자가 참 가관이었겠지만….
논문을 지도하시면서 ‘공부가 재미’ 있으시다며 논문을 읽고 또 읽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질문하시고 다시 질문하시기를 수천 번 하신 것 같다.
점심 먹는 시간이 아깝다시며 사모님께서 싸주신 찐 고구마를 나눠주시던 일, 고구마를 바닥에 떨어뜨려 주워 먹던 일, 점심 대신 율무차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래던 일…. 논문 지도를 힘겹게 하셔서 신장에 무리가 발생하셨던 일….
죄송하였다.
그러면서 다짐하였다. ‘나도 교수님처럼 스승다운 스승이 되어야겠다’. 그 이후로 학생들에게 화를 덜 내게 되었다. 교수님 덕분에, 말하자면 사람 비슷한 선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승의 날 며칠 전에 교황 레오 14세가 취임하였다. 교수님께서는 정지용과 관련, 이 부분을 정리하시길 바라셨다.
시인 정지용도 천주교 신자였다. 장남 정구관의 구술과 자료 간의 차이는 약간 있으나 정지용은 1928년 성프란시스코 사비엘 천주당(가와라마치 교회)에서 요셉 히사노 신노스케를 대부로 하여 뒤튀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일본 유학 시절 고향에 오면 옥천 성당에 들러 윤례원(토마스) 신부님을 찾아뵙곤 하였다.
천주교의 거창한 교리를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자취집 주인 아주머니를 따라 성당에 딱 한 번 갔었던 일이 있긴 하다. 그러나 가만히 한쪽에 앉아 있다가 미사가 끝나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깊은 세상의 이치를 어찌 알겠는가.
교황 레오 13세와 천주교와 그리고 정지용의 관계를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었으면 좋으련만 못내 이쉬움이 남는다. 윤례원 신부의 사진 자료를 가지고 있으나 수필이라는 글의 성격상 이곳에 싣지는 못한다. 언젠가 정리가 되는 날이 있을까?
여름 무더위와 함께 비가 내린다.
이 비가 지나면 청량한 가을 하늘이 나타나려나. 오전에 들렀던 논산 반야사 가는 길에 고추잠자리가 할 일 없이 날았다. 벼는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왜 인간들은 종교를 나누어 가지게 되었는가? 애초에 종교가 하나였더라면 나같은 모지리도 그 깊고 넓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까.
능력이 부족하거나 의지가 부족하여 잘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여전히 존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