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 시인·소설가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은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솟아오르는 감정은 마치 비 온 뒤 대지 위로 고개를 내미는 죽순과 같다. 막 사춘기에 들어선 시절, 이성에 눈을 뜨던 순간의 황홀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전까지는 장난스럽게 뒤통수를 치며 웃던 이성 친구가 어느 날 문득 달라 보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얼굴에 갑자기 후광이 비치고, 그 빛이 너무 눈부셔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다. 가슴 속에서는 이유 모를 두근거림이 시작되고, 얼굴은 금세 붉어진다. 그것이 바로 첫사랑이 찾아오는 방식이다.
첫사랑의 대상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동갑내기 친구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선생님일 수도 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교실로 들어오는 영어 선생님이 서른을 앞둔 나이라 해도, 이미 결혼한 국어 선생님이라 해도 사춘기 소년의 눈에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처럼 보인다. 큐피드의 화살은 나이나 신분, 결혼 유무 같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한 번 꽂히면, 그저 가슴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활활 번져 나간다.
불꽃 같은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로는 처음 사랑이라는 점이 크지만, 실은 사랑의 본질에 있다. 첫사랑의 본질은 순수다. 그 순수함은 조건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상대방의 단점은 보이지 않고,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상관없다고 여긴다. 키가 작아도, 성적이 낮아도, 집안이 넉넉하지 않아도 문제 되지 않는다. 오직 상대방에 대한 사랑만 존재했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성을 바라보는 눈빛에 나이, 성격, 미모, 키, 경제적 요건 같은 조건이 붙고 물빛 사랑은 혼탁한 사랑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혼을 바쳐 사랑한 순수한 사랑은 때가 묻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와 삶의 진리는 닮아있기도 하다. 조건 없이 사랑했던 그 기억은,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울 때도 조건보다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첫사랑의 실패 경험은 삶을 단순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첫 번째 가르침이다. 사랑이든 삶이든, 본질을 붙잡고 순수하게 몰두할 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루고자 하는 꿈을 첫사랑처럼 오직 순수한 목적에만 몰입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 꿈을 이루고자 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고, 시작부터 목적 달성 시 기대치에 대한 희망을 과도하게 품는다면 노력의 힘을 잃는다. 그러나 오직 순수하게 목적에만 열과 성의를 다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비록 단순해 보일지라도, 오히려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한 분야에 온 힘을 쏟은 장인이 결국 시대의 이름이 되듯, 한 가지 목표에 몰두한 인생은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목적 하나에 집중하면 삶은 저절로 기름져지고, 예상치 못한 성과까지 따라온다.
세상의 모든 원리와 이치는 상대성이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점은 첫사랑에 바친 순수와 열정의 기운 탓도 있지만,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삶도 그렇다. 이루지 못한 꿈 하나가 끝내 아쉬움으로 남아 사람을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첫사랑은 개인의 연약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를 비추는 은유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흘러도 첫사랑을 떠올린다. 그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첫사랑은 언제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조건에 흔들리지 말고, 본질에 집중하라고. 많은 것을 욕심내지 말고, 단순한 열정 하나로 길을 열라고.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남긴 가장 위대한 선물은, 바로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지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