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용 수필가

▲김향용 수필가
▲김향용 수필가

더위로 애먹던 여름 덕에 들녘의 벼들이 고개 숙인다. 시간은 정직하다.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입학한 지 3년 차, 3학년 1학기 출석 수업하던 날 강의실은 오랜만에 만난 학우들과 그간의 안부를 묻느라 화기애애했다.

2교시 마치고 간식 시간, 칠순 넘은 K학우가 비닐 팩에 무, 당근을 손가락 굵기로 깎아 온 것을 내놓는다. 캐리어를 끌고 교실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마치 거북이처럼 굽은 등을 업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과 함께 남을 위하는 배려 또한 깊은 것 같아 자꾸 눈길이 갔다.

학우들 평균 연령대가 어림잡아 육십 초반은 되는 것 같다. 나이에 상관없이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한 학기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대단하다. 일인 몇 역을 해내면서 공부 또한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을 끌고 간다고 생각하니 학우들이 존경스럽다. 교탁에 놓여있는 노란 후리지아 꽃향기가 새로운 기운을 북돋아 주는 듯하다.

내가 직장을 다니며 학교 문을 두드린 것은 수필을 배우며 국문학에 대한 앎이 너무 부족해서다. 무서운 갈증이었다. 그러나 여건은 녹록지 않았다. 새벽에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며 고령의 엄마를 모시는 일은 1인 3역의 고역이다. 그럼에도 버틴 것은 하나하나 터득하는 학구의 기쁨이 컸고 무엇보다 함께 공부하는 학우들의 의연한 모습과 열정이 자극제가 되어서다. 이래서 ‘함께’라는 의미가 각별한가 보다.

점심을 먹고 졸음이 올 듯한데 본교 이호권 교수님 강의 두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방송강의를 들으면서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명강의라고 늘 생각했는데, 출석강의 역시 명강사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아쉬운 점은 교수님의 내년 퇴직, 혜성 같은 별 하나가 지워지는 것 같았다.

학우 중 제일 열심히 질의하고 대답하는 홍보부장 G는 건강이 좋지 않으면서도 늘 우리를 위해 학습 자료를 자세하게 안내한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긍정적으로 답해주고 단톡방에서는 댓글로 용기를 준다.

1학년 입학 뒤 첫 대면 하던 날 선배님들의 격려가 있었다. 대표를 뽑아야 한다며 교육부장, 총무, 부대표, 감사 등 감투를 하나씩 맡아야 졸업할 수 있다고 했다. 책임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하다 보면 졸업도 두렵지 않을 거라며 힘을 북돋웠다. 육십 후반 Y가 영원한 학년 대표로 선출되었다. 대표는 솔선수범하면서 한 사람, 한사람 다독이며 정을 붙이고 공부할 수 있도록 정성껏 도와줬다.

2학년 2학기였다. 밀린 과제물을 기간 내에 제출하려고 문제를 몇 번씩 읽어가며 숙지하고 작성하는 과정이 힘들었다. 잘 써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중압감은 한숨만 나오게 했다. 그날 점심은 올 A를 받아 장학금을 탄 부대표 S가 한 턱 쏜다며 추어탕을 사주었다. 그것은 그냥 밥이 아니라 응원의 묘약이었다. 식사하며 서로 나누는 사연이 위로가 되었고 그래도 힘내자는 격려가 되었다. 참 이상했다. 우리는 공동의 하나였다.

창가의 c가 졸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 정겹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서는 틈틈이 농사를 짓는다. 거기에 남편의 병 수술로 힘들 때 학우들의 뜨거운 응원으로 중단 없이 다닐 수 있어 기쁘고 흐뭇했다.

총무가 준비한 다과와 따스한 차 한 잔에 한 입 베어 문 무와 당근의 오도독 씹는 맛이 오늘따라 맛있다. 우리는 만학도다. 어렵고 힘든 향학의 고개를 넘어 모두 함께 졸업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왜냐하면 제때 배우지 못한 아픔의 시간을 간직한 용사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해낼 것이다. 우리의 가을은 알곡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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