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 시인

▲ 김미옥 시인

까만 비닐봉투를 삼킨 고래. 그 장면을 처음 본 건 뉴스 화면 속이었다. 거대한 몸체는 이미 숨을 멈췄고, 뱃속에서는 수십 장의 비닐봉투가 쏟아져 나왔다. 익숙한 검정, 매끈한 질감. 그것은 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만지는 물건이었다.
나는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한다. 동네 사람들이 오가며 잠시 숨을 고르는 쉼터 같은 곳이다. 문을 열면 유리문에 이슬이 맺히고, 냉장고 문틈에서 흘러나오는 찬 기운이 새벽 공기와 섞인다. 종이 딸랑 울리며 하루가 시작된다.
물건을 고르는 손님들의 걸음,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 비닐봉투 바스락거림이 합창처럼 들린다. 그 앞에서 나는 늘 같은 대사를 되풀이한다.
“봉투 드릴까요? 까만 비닐봉투는 50원입니다.”
그러나 손님의 반응은 다르다. 어떤 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이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린다. “그깟 50원”이라는 말이 바늘처럼 꽂히는 날도 있다.
50원. 아주 작은 숫자 같지만 그 안에는 내 하루의 무게가 담겨 있다. 50원어치 봉투가 아니라, 50원어치의 설명과 오해, 삼켜야 하는 감정이 들어 있다. 찢긴 말 한마디, 비껴간 눈빛은 질긴 비닐처럼 잘 썩지 않고 오래 남는다.
그러나 다른 풍경도 있다. 천 장바구니를 챙겨오는 손님. 그 안에는 생활의 태도가 곱게 접혀 있다. 사과와 두부, 우유를 차곡차곡 담으며 웃는 얼굴을 볼 때면 습관이 얼마나 단단한 힘인지 알게 된다. 그것은 인색함이 아니라 지구를 아끼는 지혜였다.
“엄마, 봉투 말고 장바구니 있잖아.” 아이는 엄마보다 먼저 계산대에 서서 씩씩하게 말한다. 작은 팔로 물건을 안고 나서는 모습이 대견해 웃음이 난다. 어린 목소리의 그 한마디가 바다에 돌멩이를 던진 듯 파문을 그린다. 언젠가 이 아이들이 자라서도 오늘의 습관을 이어가겠지. 나는 그 속에서 희망의 파도를 본다.
젊은 부부가 함께 온 날도 있다. 남편은 물건을 들고, 아내는 장바구니를 챙긴다. “우린 봉투 필요 없어요.” 두 사람이 함께 내미는 장바구니에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생활을 함께 짊어지는 마음이 담겨 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바다 위를 나란히 헤엄치는 두 마리 고래를 본다.
물론 “오늘도 깜빡했네”라며 봉투를 집어 드는 손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미안함이 묻어 있다. 장바구니를 놓고 온 자신을 탓하는 웃음은, 다음에는 꼭 챙기겠다는 다짐이 된다.
저녁 무렵엔 풍경이 달라진다. 퇴근길 직장인들이 편의 삼아 들른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죠.” 내가 인사를 건네면, 피곤한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봉투를 받지 않고 물건을 그대로 가방에 쓸어 담는 젊은 손님을 보면, 작은 변화가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계산대에 서서 생각한다. 우리가 일회용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물건만이 아니다. 말도, 표정도, 관계도 일회용처럼 쓰이고 버려질 때가 많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숨결과 지구의 호흡은 그렇게 쉽게 버려질 수 없는 것들이다. 작은 실천이야말로 오래 남아 서로를 살린다.
뉴스 속 고래의 배에서 쏟아져 나오던 봉투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하다. 그러나 동시에 믿는다. 무심한 선택이 고래를 죽였다면, 우리의 의식적인 선택은 고래를 살려낼 수 있다고. 장바구니를 드는 한 사람, 봉투 대신 웃음을 건네는 한순간이 모여 바다의 호흡을 되살릴 것이다.
나는 매일 계산대 앞에서 묻는다.
“봉투 필요하신가요?”
그리고 곱게 봉투를 접는다. 작은 숨결을 달래듯, 바다의 파도를 어루만지듯. 오늘의 작은 숨들이 내일의 바다를 바꿀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장바구니를 흔들며 웃는 날, 고래도 다시 바다 위로 힘차게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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