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자 수필가
손으로 쓴 편지가 귀한 시대다. 소설가 안 선생님께서 새로 출간한 수필집을 받고 편지를 보내주었다. 선생님께선 내가 쓴 책을 받으면 꼭 당신 존함이 인쇄된 200자 원고지에 답장을 써 보낸다. 편지의 행간에 깃든 문장의 울림이 고향 집 장독대 곁에 핀 분꽃처럼 평안하고 다정하다.
그래 편지를 받으면 귀중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아 편지봉투를 몇 번이고 어루만지게 된다. 나 역시 손으로 편지를 써본 지 오래되었다. 메일이 아니면 카카오톡을 이용해 책을 읽은 소감이나 인사를 대신했던 건 편리함 때문만은 아니다. 글씨가 남우세스러울 만치 졸렬해서다.
모처럼 서랍 속에 깊이 들어 있는 원고지를 꺼냈다.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면 혼자서도 쑥스럽다. 볼을 붉히며 졸렬한 필체로나마 정성스럽게 회답을 써 봉투에 넣고 우체국을 찾아갔다. 그러나 우체국에선 우표 대신 우체국 바코드를 찍어 편지함에 넣은 게 낯설어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 처음 편지를 쓴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농촌 학교였지만 베이비 부머 이전에 태어난 우린 한 반에 72명씩 2반으로 나누어져 콩나물시루를 연상시킬 만치 책상과 의자를 촘촘히 좁히고 수업을 들어야 했다.
10월 한글날을 앞두고서였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쓰기로 했다며 편지지 두 장씩을 나누어주고 편지지에 바로 쓰지 말고 공책에 먼저 연습한 다음 옮겨 적으라고 일러주었다. 연필을 쥔 손에 자꾸만 힘이 실리는 걸 억누르며 또박또박 자음과 모음으로 문장을 만들어 편지지에 옮겼다. 너무 오래되어 무슨 내용을 썼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건 답장을 받은 아이는 우리 반에서 나 혼자였다는 기억만은 원형에 가깝다. 나는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고, 그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엄마와 두 오빠에게 군인 아저씨가 보낸 편지를 자랑삼아 목소릴 높여 읽었다.
그다음 편지를 줄 뿔나게 쓴 건 문단에 등단한 이후였다. 1996년 10월에 첫 수필집 <달의 서곡> 출간을 시작으로 편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당시 문단의 어른들은 후배 문인들의 저서를 받으면 격려 차원에서 간단하게나마 답장을 보내주었다. 더러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분도 있었고, 한글학자 이상보, 진주 설창수, 제천 박지견 어르신들은 휘호(揮毫)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황송해 답장을 써 들고 우체국을 찾아가 우표를 사서 붙일 양이면 글 쓰는 고통이 기쁨으로 환치되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첫 수필집을 내고 받은 편지가 인텍스 클리어 바인더 40매 앞뒤를 꽉 채웠다. 80통이 넘는 편지를 받았으나 지금은 편지를 보내준 원로들은 거반 고인이 되었고 이제는 내가 그분들 뒤를 따라갈 연륜의 언저리에 이르렀다.
그다음에도 책을 낼 적마다 따라붙은 편지 모음이 여섯 권이다. 평론 모음도 따로 한 권을 모았다. 언젠가는 충주시에서도 문학관을 별도로 만들어 줄 것으로 믿는다. 한 평, 아니면 반 평정도 방 하나 내 이름으로 정해준다면 여섯 권의 클리어 바인더에 든 손 편지와 여덟 권의 저서를 기꺼이 내주어줄 테다. 그런 다음 하현달 하나 마음의 뜰에 들이면 족하지 않겠나 싶다. 아니 그리된다면 나는 일곱 개의 강이 되어 물에 뜬 일곱 개 하현달을 건져 들고 마실 가듯 저승으로 훌쩍 넘어가면, 얼쑤 하늘 문이 절로 열릴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