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시카고의 저녁 공기가 쇳내를 풍기며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을의 바람은 차가웠고, 거리 위로 뿌려진 최루제는 사람들의 눈을 뜨겁게 찔렀다. 하늘에는 헬기가 맴돌고, 골목마다 주방위군의 군화가 콘크리트를 두드렸다. 경적과 함성, 총성이 한데 뒤섞인 도시의 심장은 마치 전쟁터의 그것처럼 불규칙하게 뛰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시카고’였지만, 이 밤의 풍경은 이미 ‘민주주의의 심장’이 아니라 ‘내전의 예고장’에 가까웠다.
연방 군대의 시위 진압. 이 한 줄의 헤드라인이 지닌 함의는 미국 역사에서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미국은 연방제로 이루어진 나라다. 주의 치안과 치세는 주 정부의 권한이며, 연방정부가 군대를 투입하는 건 헌법의 최후 보루를 건드리는 일이다. 이 보루를 무너뜨리는 열쇠가 바로 ‘반란법’이다. 남북전쟁의 불길 속에서 만들어졌고, 1950년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인종차별을 고집하는 남부 주에 연방군을 투입할 때 사용된 법. 미국에는 계엄법이 없기에, 반란법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최후의 칼날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주지사와 법원의 제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카고는 적의 소굴이며, 미국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외쳤다. 마치 오래된 독재자들의 음성을 흉내 내듯, “도시를 훈련장처럼 쓰겠다”는 그의 말은 미국 정치의 금기를 깨는 폭음으로 울려 퍼졌다. 주의 자치권, 사법의 판단, 민주주의의 절차 따위는 그의 언어에서 무력화된 지 오래였다. 만약 반란법 발동이 일상화된다면? 미국은 더 이상 자유의 나라가 아니라, ‘군화가 민주주의 위를 밟고 지나가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절망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일리노이 주지사, 주방위군 장교, 연방 판사들—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들은 아직 총 대신 헌법을 들고 서 있다. 하지만 이 방어선은 얇다. 트럼프의 선동과 갈라치기는 미국 사회의 심장을 점점 더 깊이 파고든다. 극단적 이념 대립과 경제적 불평등, 인종 간 불신이 뒤섞이며 불길은 번져간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고 믿었던 많은 이들이, 이미 무너진 문 앞에서 현실을 깨닫고 있다.
<어떻게 내전은 일어나는가>의 저자 바버라 월터는 경고했다. 민주주의도 아니고 독재도 아닌 ‘아노크라시(anocracy)’ 상태—중간 지대에 빠진 국가야말로 내전의 가장 비옥한 토양이라고. 미국은 지금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백인 보수층의 심연에는 절망과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있다. 자신들이 ‘중심’이던 세상이 흔들린다는 감각, 미래를 빼앗겼다는 박탈감. 이것은 폭발 직전의 마그마와 같다. 불길은 아직 언덕을 넘지 않았지만, 이미 지하의 열기는 땅을 갈라터지고 있다.
최근 조지아주에서 한국 국민이 억류된 사건 또한 단순한 이민 단속이 아니다. 무너지는 미국 민주주의의 균열이 가장 약한 고리를 향해 터져 나온 것이다. ‘가치 동맹’이라 부르던 미국과의 관계도 이젠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곧 발표될 미 국가국방전략서(NDS)는 해외 주둔 미군 축소, 합동훈련 감축, 방위비 분담 전가 등 냉혹한 현실의 목록으로 채워질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자유의 수호자 미국’은 점점 퇴색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무너짐은 언제나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부패와 분열에서 시작됐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도 그랬고, 1930년대 독일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 미국이 그 길목에 서 있다. 우리가 동맹의 이름으로 손을 맞잡고 있던 그 나라는 이미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폭풍이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지반이 침식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물음이 주어진다. “우리는 과연 어떤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가?” 세계의 패권국이 흔들릴 때, 가장 먼저 덮치는 건 변방의 동맹국이다. 우리는 다시 생존의 지도를 그려야 한다. ‘설마’라는 안일함이 아니라, ‘만약’이라는 냉정함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