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인력이 이끄는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길

▲ 뮌헨시신청사. 사진 이태용 기자

독일도 대한민국처럼 노동가능인구가 감소하고 연금 수급자는 증가하는 가운데 숙련 인력이 빠르게 현장을 떠나는 위기를 마주했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독일은 ‘퇴직’의 경계선을 허물고 있다. 정년을 67세로 높이고 유연 은퇴 제도를 도입해 고령 인력이 노동시장에 머무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정책들은 단순한 정년 연장이 아닌 세대 간 연대와 지속 가능한 일자리 구조 개혁으로 평가받는다. 독일의 초고령시대 중년 일자리 위기 대응법과 충북에 주는 정책적 시사점을 소개한다.

◆정년 67세 연장 제도
정년 67세 연장 정책은 2007년 독일 연방의회(Bundestag)가 ‘정년 67세 법안’을 통과시키며 시작됐다.
당시 정책의 배경에는 급속한 고령화와 노동가능인구 감소라는 현실이 있었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사회에서 근로 기간이 그대로라면 연금 재정은 불안정해지고 산업은 인력 부족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법은 기존 65세였던 법정 정년을 67세로 올리는 것으로 단순히 은퇴 시점을 늦추는 조치가 아니라 연금제도 개편과 노동시장 구조조정을 포괄한 종합 개혁이다.
근로 기간을 늘려 연금 재정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숙련 인력을 산업 현장에 더 오래 남게 하려는 독일 정부의 구조적 대응이었다.
독일 정부는 기업과 근로자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연착륙 방식을 택했다.
정년을 한 번에 높이는 대신 매년 1~2개월 약 2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행하도록 설계했다.
2012년부터 적용이 시작돼 2031년까지 출생연도별로 순차 확대됐으며 1964년 이후 출생자부터는 정년 67세가 기본 기준이 된다.
그 결과 기업은 인력 운용 계획을 장기적으로 세울 수 있었고, 근로자 역시 은퇴 시점을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정책 시행 이후 가시적인 성과도 나타났다.
OECD 통계에 따르면 독일의 60~64세 고용참여율은 2024년 기준 66.7%로, OECD 평균(55.9%)을 크게 웃돌았다.
라르스 클링바일 하원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독일 경제 성장을 위한 유인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를 위해 기업들은 특히 나이 많고 경험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정년 67세 정책이 단순히 연금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경험 많은 고령 근로자를 독일 산업 경쟁력의 핵심 자원으로 인식하는 제도적 전환임을 보여준다.
결국 독일의 정년 연장 정책은 ‘은퇴를 늦춘다’는 단편적 접근이 아니라 고령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연금·고용·노동정책을 함께 조정한 국가 차원의 전략적 개혁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한 제도 변경이 아니라 고령층의 노동 참여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활용한 성공적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유연 은퇴(Flexi-Rente) 제도
독일은 단순히 정년을 올리는 것만으로는 고령사회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유연 은퇴(Flexible Retirement)’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고령 근로자가 정년 전후에도 노동시장에 남아 일할 수 있도록 하면서 연금 수령 시점과 방식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게 한 제도적 장치다.
독일 연방정부에 따르면 유연 은퇴는 독립된 연금모델이 아니라 연금 수령과 근로소득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한 규정들의 집합이다. 이는 제도가 노동 연장이 아니라 연금과 고용의 병행 구조를 제도적으로 구현한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유연 은퇴 제도의 핵심은 근로자가 자신의 상황에 맞춰 노동시간 소득 연금 수령 방식을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년 이전에도 일정 소득을 얻으며 부분 연금을 받을 수 있고 정년 이후 계속 일할 경우 연금액이 증가한다. 기업은 고령 근로자의 체력 부담을 덜기 위해 근무시간을 조정하거나 직무를 전환해 경험과 기술이 단절되지 않도록 돕는다.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재교육과 재활 지원 체계를 강화하고 노동시장과 연금제도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고령층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같은 제도적 변화는 실제 고용률 상승으로 이어졌다. OECD 자료에 따르면 독일의 55~64세 고용률은 2024년 기준 75.2%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과거처럼 장년층이 일터를 완전히 떠나는 대신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노동시장에 잔류할 수 있는 구조가 자리 잡은 것이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연금제도 개편이 맞물리며 고령 인력의 경제 참여를 실질적으로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유연 은퇴 제도는 단순히 근로기간을 늘리는 정책이 아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근로자의 존엄과 선택권을 보장하려는 사회적 장치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근로자는 소득 절벽의 불안을 덜고 기업은 숙련 인력을 잃지 않으며 국가는 연금 재정의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유연 은퇴 제도는 사회적 합의의 결과다. 노동계는 고령 근로자의 건강권 보장과 공정한 임금체계 유지를 요구했고 정부는 이를 제도 설계에 반영했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적 신뢰가 있었기에 유연 은퇴는 단순한 고용정책을 넘어 세대 간 연대를 실현하는 독일형 고령사회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결국 독일의 정년 67세 상향과 유연 은퇴 제도의 결합은 연금 재정의 지속 가능성과 산업 인력 유지라는 두 축을 동시에 겨냥한 전략적 설계다. 정년을 단계적으로 연장하는 동시에 고령 근로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시장에 남을 수 있는 선택지를 제도화함으로써 독일은 고령사회에서도 노동력과 사회적 경험을 잃지 않는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냈다.

◆사회적 합의와 정책 정착…충북에 주는 시사점은

독일은 제도 도입 과정에서 노사정 대화를 공식화했다. 노동계는 건강권 보호와 임금 차별 방지를 요구했고 정부와 기업은 취약계층 보호와 인센티브 설계를 수용했다. 공식 청문회, 의회 심의, 노조·기업 간 협의가 법안 설계 단계부터 이루어졌고 그 결과 제도 수용성이 높아졌다.
독일의 사례는 충북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충북은 단순히 정년 연장에 머물지 말고 노동시장 전환 통로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재교육 프로그램과 시간제 근무제, 직무 재배치 체계를 통해 고령 근로자가 숙련을 유지하며 현장에 남을 수 있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특히 60세 이상 인력이 많은 제조업과 돌봄 분야는 우선 적용 대상이다. 또 지역 노사정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상설화해 정책의 지속성과 합의 구조를 확보해야 한다. 고령화는 위기가 아닌 기회다. 독일의 경험은 충북이 고령 인력을 지역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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