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우리 사회에서 철학은 늘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철학이 있는 관리자’라거나 ‘철학이 있는 교사’와 같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철학에 대한 평가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많은 경우 철학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 폄하되고 그러다 보니 자신의 자녀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면 대체로 고민에 빠진다. 물론 로스쿨이 생긴 이후에 그 입학시험에서 논리적 판단력과 글쓰기가 중요해졌기 때문에 실용적인 이유로 철학과에 진학하는 사람들이 조금 늘기는 했다.
‘철학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내게 던져진다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철학은 철학자들의 전유물로 받아들여졌기에 일반 시민인 우리가 이런 물음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답을 할 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철학책 중에는 정말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런데 종이책이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는 이전 시대의 예측과는 달리, 한 해에 수백 권씩 출간되는 교양철학 책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특히 최근에는 서양 고대철학인 스토아철학과 우리 전통 철학인 불교철학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 두 철학은 삶의 방식으로서 철학에 주된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묻는 삶의 방식으로 철학을 바라보면 그것은 전문 철학자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민사회에서는 모든 시민이 자신의 삶과 우리 사회의 주인임을 아는 것을 전제로 이런 의미의 철학함 역량을 갖추고 있기를 기대한다. 200여년 전 왕을 단두대에 보내는 시민혁명에 성공한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이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프랑스어 시간 대신에 철학 과목을 필수로 넣고, 대입 시험인 바깔로레아에서 철학을 필수로 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요즘 프랑스도 극우 정당이 활개를 치는 어려움을 맞고 있지만 그럼에도 누구라도 철학을 공부한 경험이 있는 시민들이 더 나빠지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는 기대가 그들에게는 있는 듯하다.
우리는 어떤 상황일까. 시민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대의정치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거대 양당은 모두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대표를 맞게 됨으로써 그 대표성을 상당 부분 잃어버리고 있다. 두 거대정당 사이의 적대적 공존이 일상화됨으로써 철학함이 가능한 정상적인 정치인이 설 수 있는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런 정당구조에서는 시민들의 정당한 이해관계가 왜곡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중 하나가 지난 해 계엄으로 인한 폭력에의 노출과 극심한 고통이다.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난국을 한 번에 넘어설 수 있는 뾰족한 대안은 없다. 우리가 광복 후 80년 동안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친 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압축적 산업화의 민주화 모두의 성공이 드리운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앞선 산업화와 민주화의 여정을 200년 이상의 시간을 거쳐 걸어온 서구에 비해 우리는 길게 잡아도 50년 이내의 시간 안에 해냈고, 그것은 다시 세대와 장소의 압축으로 이어져 곳곳이 틀어지고 짓눌리는 고통과 왜곡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양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고통과 왜곡이 문화적으로 해석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현상과도 마주하게 됐다. 바로 영화와 노래로 상징되는 한류(韓流)가 그것이다. 급속한 산업화 물결 속에서 낙오한 한 도시 빈민층 가정을 그린 영화 '기생충'이 세계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았고, 케이팝(K-Pop) 스타들을 길러내는 엄격한 훈련 과정에서 탈락한 젊음의 좌절과 도전을 그린 만화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영화의 차원을 넘어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관심을 불러내는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시기다. 20세기를 맞으면서도 벗어버리지 못한 일본과 미국, 유럽 등을 향한 순차적인 열등감과 그 배후에 숨은 부끄러운 우월감을 버리고, 자신과 우리나라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지렛대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땅에서 넘어지면 바로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고 말한 고려 선승 지눌이 강조한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이고, 삶의 철학적 훈련장은 바로 지금 여기임을 강조하는 스토아철학의 프로소케(prosoche), 즉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는 실천의 지혜이기도 하다.
스토아 철학자이자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모든 사람은 단지 지금 이 순간에만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잘 사는 방법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 여유를 가지고 뒤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기도 해야 하지만, 그 중심은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류도 지난 시간 그 각각의 시간과 장소에 충실하고자 했던 우리의 노력들이 모여 이루어진 결과일 것이다. 자칫 오만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한류라는 이 의외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또 연대하면서 함께 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은 불교와 스토아철학이 함께 권하는 철학함의 과정이자 삶의 방식으로서 철학에 충실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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