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윤 수필가

▲이호윤 수필가
▲이호윤 수필가

이른 아침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집 앞 단골 식당에서 사골곰탕 한 그릇을 사 왔다. 행사 준비로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오히려 늦어 마음이 급했다. 플라스틱 용기에 뜨거운 국물 담는 걸 싫어하는 걸 잘 아는 사장님은 미리 얼려둔 것을 싸주셨다.

곰탕을 불 위에 올려놓고 출근 준비로 분주했다. 이제 따끈한 국물에 밥 한 숟갈 말아 후딱 먹고 나가면 된다. 화력 좋은 가스 불에 진즉 팔팔 끓는 소리가 난 것을 잠깐 꺼두었다가 뚜껑을 열어보니, 와락 달려드는 하얀 김 사이로 외로운 작은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난감하다. 투명한 힘줄을 드러낸, 얇게 썬 회갈빛 고기들이 한데 뭉쳐 공처럼 몸을 말아 웅크리고 있다.

민우를 처음 맡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담당했던 선생님은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라고 했다. 착한 아이인 것 같은데 종종 거짓말을 한다고도 했다. 내게도 숙제를 못 해오거나 결석한 이유를 거짓말로 둘러대다 들키곤 했다. 수업 시간에 과자를 먹지 않는다든가 하는 작은 규칙들을 어길 때면 몰랐다고 우기기도 일쑤였다. 야단을 맞은 뒤에는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또, 머리가 좋은 편이어서 등원하여 잠깐의 벼락치기 후에 테스트에 간신히 통과하는 것으로 공부를 대신하는 것도 걱정스러웠다. 무엇보다 결석이 잦은 편인데도 민우의 일정이 복잡해 보강할 짬이 안 나는 것이 내게는 가장 곤란한 일이었다.

손으로 눌러보진 않았지만 고기는 아직 냉기로 얼어붙어 있는 듯했다. 고기를 펼쳐 놓으려 단단한 쇠젓가락으로 틈새를 노렸지만 비집고 들어가지질 않았다. 이런. 그냥 먹지 말고 가버려? 시계를 흘깃 쳐다보니 다행히 아직 시간은 있다. 조급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불을 켠 후 은근한 약불로 화력을 줄였다. 방심하다 혹시 국물이 졸아 버릴까 봐 식탁 앞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나는 민우가 달라지기를 바랐다. 작은 일에도 칭찬하며 살살 달래기도 하고 걱정스런 말투로 야단도 쳐보았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여전히 방어적이고 틈을 주지 않았다. 차츰 나는 그럴싸한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 하루 한 시간, 주에 서너 번 만나는 아이의 마음에 가닿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엄마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민우의 간절함이 때론 안쓰러웠지만 방문을 걸어 잠그고 볼멘소리를 지르는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기에는 여건이 녹록지 않다고. 민우는 오직 엄마의 사랑만을 갈구할 뿐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밤늦도록 일해야 하는 엄마의 늦은 귀가로 민우의 귀가 시간과 취침 시간 역시 늦다 보니 민우는 몸과 마음이 다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초조감이 슬슬 고개를 드는 순간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어느새 고기가 덩어리를 풀고 나와 뽀얀 국물 속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따끈한 국물의 냄새는 팔팔 끓여 데웠을 때보다 오히려 더 구수하고 진했다. 뜨거워서 후후 불어가며 먹지 않아도 되는, 딱 알맞은 온도도 좋았다. 딱딱했을 고기가 부드러운 육질을 내준 것은 물론이다. 게다가 뜨거운 국물을 삼키지 않았으니 내 속이 편안했을지도.

가스불처럼 활활 타올랐던 나의 욕망을 불현듯 깨달았다. 민우에게, 아니 내게 필요한 것은 온기다. 아니 무위(無爲)다. 아이를 문제로 보고 해결하려고 했던 조급한 마음을 버릴 것이다. 하고자 하는 어떠한 마음 없이 고요히 있을 것이다. 시간이 좀 더 느린 걸음을 걸을지라도 내 안의 온기가 뽀얀 국물처럼 우러나오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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