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기 한국교통대 교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여유나 융통성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유토리(ゆとり)’라는 단어가 있다. 본래는 형편과 상황에 맞게 일을 처리하는 재주를 의미한다. 1995년 문화체육부 고시에서는 이를 ‘여유’ 또는 ‘융통’으로 순화해 사용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여전히 유토리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60~1970년대 일본은 고도성장에 힘입어 교육열이 과열되고, 과도한 학습량과 주입식 교육이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스트레스와 사회문제도 심화됐다. 이에 일본 정부는 1980년대 후반 학생들의 학업 부담을 줄이고 창의력과 전인교육을 추구하는 유토리 교육을 도입했다. 그 결과 초·중학교 교과 내용이 약 30% 감소하고 전체 수업시간도 10%가 줄었다. 학생 중심 수업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유토리 교육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기초학력 저하와 학업성취도 하락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학부모들은 공교육을 불신하며 사립학교로 몰려 교육 양극화가 심해졌다. 이는 취업과 입시 경쟁이라는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교육 내용 감축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결과였다. 결국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1년 학습지도요령 개정에서 유토리 교육을 사실상 폐지하고 학력 강화 정책으로 방향을 되돌렸다. 그러나 유토리 교육으로 인한 문제는 여전히 일본 사회에 후유증을 남겼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러한 일본의 사례는 2000년대 이후 우리 교육정책과 닮아 있다. 우리나라 교육과정 개정 역시 학습량 경감, 주입식 수업 지양, 사교육 부담 완화를 목표로 추진돼 왔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교육 의존은 여전하고 입시에 유리한 과목 선택 쏠림으로 인해 고교 교육과 대학 교육 간 연계가 약화되고 있다. 실제로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한국은 여전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상위권 학생 비율 감소와 기초학력 미달 학생 증가가 동시에 나타나는 모순적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교육 정책 성과가 제한적임을 보여준다.
대학에서는 신입생 기초학력 저하에 대한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데, 필자 역시 대학 현장에서 이를 체감하고 있다. 특히 이공계 진학에 필수적인 고등학교 수학 교육과정 변화는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통계, 확률, 자료 해석 등 현실 연계형 내용이 확대된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대학 수학 학습을 뒷받침하는 심화 개념이 선택과목으로 전환되면서, 이를 이수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로 인해 대학에서 기초과목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이는 학습량 감소 정책이 결코 학생 능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돌아보면 지금까지의 교육과정 개정은 학생들의 행복을 높이지도, 사교육을 줄이지도, 창의성과 사고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지도 못했다. 단지 학습 부담을 줄이는 방식을 반복해왔지만 기술 변화가 급격한 시대에 학생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오히려 늘고 있다. 입시 체제는 그대로 둔 채 학습량만 줄이는 방식의 정책 변화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며 이는 학생과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21세기 학생을 과거의 교육 방식에 가둬서는 안 된다. 미래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도록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학습, 그리고 학생 개별 역량을 확장하는 교육 환경이 필요하다. 또한 대학 역시 신입생 학력 저하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 시스템의 혁신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교육과정 개편이 단순히 학습량을 조절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학생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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