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호 충북도 과학기술정책과 주무관
“나는 우리 금명이가 날아올랐음 좋겠어. 상을 차리는 사람이 아니라 상을 엎는 사람이 되었음 좋겠어.”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속 이 대사는 단순히 엄마의 바람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세상의 판을 바꾸고 싶은 모든 사람의 외침이기도 하다. ‘상을 차리는 사람’은 늘 뒤에서 묵묵히 준비하고 헌신하는 존재로, 과거에는 당연히 ‘엄마’라는 인식이 강했다.
우리 사회는 분명 달라지고 있다.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거리에서도 ‘양성평등’이란 말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의 빈도만큼 우리의 일상이 달라졌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여전히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곳에서는 ‘차리는 쪽’과 ‘앉는 쪽’이 명확히 나뉘어 있다.
그 불편한 경계가 분명한 곳에서는 여전히 여성이 명절에 주로 음식을 준비하고, 아이가 아플 때 먼저 달려가며, 직장에서는 “둘째 낳으면 그만두겠지”라는 말을 듣게 된다. 반대로 남성들은 육아휴직을 내면 눈치를 봐야 하고 아이가 아파도 달려가지 못하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보조 양육자로의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이 상, 그냥 엎어버릴까?” 하지만 그 마음은 대부분 다시 삼켜진다. 관습의 무게는 때때로 설거짓거리보다 무겁고, 주변의 시선은 상다리보다 단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을 엎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단순히 반항하거나, 기존 질서를 부수는 사람이 아니다. 상을 엎는다는 건,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기존의 불평등한 틀을 깨고 모두가 함께 앉을 수 있는 새로운 상을 차리기 위한 용기다.
드라마 속 주인공 애순이(엄마)의 바람처럼 그녀의 딸은 상을 엎는 사람이 됐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에 충실하기를 강요하는 결혼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이후 IMF로 일자리를 잃고 취업조차 힘든 상황에서 오히려 창업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우리가 금명이를 응원하는 이유는 그녀가 세상이 정한 역할을 의심하고 스스로 선택하려 했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남자도, 여자도 똑같이 대접받아야 한다”는 구태의연한 말도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작은 선택 속에 있다. 딸에게 “조신하게 굴어라” 대신 “당당하게 말해라”라고 말하는 부모의 한마디, 상사의 ‘남자가 왜 이렇게 소심해’라는 농담에 웃지 않는 용기, 명절에 남자상, 여자상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앉자고 돌아앉는 용기.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진짜 평등을 만든다.
물론 상을 엎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엎을 용기도 필요하고, 엎은 뒤 다시 차릴 인내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누가 상을 차리느냐’가 중요한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먹고,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먼저 상을 엎어야 한다.
결국 양성평등은 법이나 제도 이전에 마음의 평등에서 시작된다.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은 서로의 자리를 바꾸려는 싸움이 아니라, 함께 앉을 자리를 넓혀 가는 여정이다. 드라마의 그 한마디처럼,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상을 차리는 사람’이 아니라, 불평등한 상을 엎고 더 넓은 더 평평한 자리를 만드는 사람이 돼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