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두 <청주 봉명고 교사>

얼마 전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멋있는 헐리우드 배우 주연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영화였다.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액션과 인간 복제를 주제로 한 잘 짜여진 갈등 구조는 손에 땀을 쥐게 해주었다.

정점에 다다른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나름의 재미를 느껴가던 중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내게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황당함을 선사해주었다.

여주인공을 사랑한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희생해 지구를 구해냈다.

보통의 영화라면 여기에서 끝이 났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의 또 다른 복제 인간이 나타나 여주인공과 해후하며 끝이 난다.

‘1번이든, 10번이든, 100번이든 상관없다는 말인가...’

나는 너와 왜 다른가.

그것은 바로 서로 다름. 즉, 정체성에 기인한다. 나는 ‘나’라는 정체성으로 너와 다른 것이고, 너는 ‘너’라는 정체성으로 나와 다른 것이다.

헌데, 여자 주인공이 사랑하던 1번과 얼굴이 똑같다고 해서 10번, 100번과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인간 복제보다 더한 가치 충격을 느꼈다.

극장을 나와 집으로 가던 중 생각은 자연스레 학교 교육 현장으로 이어졌다.

나는 아이들을 단순한 번호로만 대하지는 않았나.

1번, 2번, 3번... 1등, 2등, 3등...

마치 아이들은 영화 속 복제 인간들처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리고 하나의 1등을 생산하기 위해 모두 같은 시험을 치른다.

이렇다보니 너와 내가 다르다는 ‘다름’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상호 존중의 마음이 생기고, 그것이 점점 공동체의식으로 발전할텐데, 기본적인 다름의 교육이 선행되지 않기에 타인의 심리상태를 추측하지 못한다.

예전 학교폭력계에 있었을 때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같다.

‘저는 정말 장난이었어요.’ 나와는 다른 타인의 감정을 추측하는 법을 배워본 적 없는 아이들에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대로 타인도 생각하리라는 잘못된 기본 전제가 폭력의 문제, 따돌림의 문제를 발생시킨 것이다.

결국 학교 폭력, 따돌림 등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의 해결 방법의 전제는 나와 네가 서로 다르다는 ‘다름’의 교육에서 출발할 것이다.

당장 아이들을 만나면 너는 2학년 1반 몇 번이 아닌, OOO이며, 네 옆자리 학생도 몇 번이 아닌, OOO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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