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회유에 결연히 저항… 결국 소련으로 망명길

▲ 포석 조명희 선생은 1928년 일본의 압제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다. 조철호 답사단장에 의하면 포석은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허름한 옷차림으로 마포나루에서 출발해 중국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다고 했다. 신한촌 개척리의 옛 모습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그 옛 건물 찾기가 다시 시작됐다.

그 건물을 찾아야만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1928년 신한촌을 이루면서 살던 우리 고려인들의 삶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타린의 강제이주 정책과 이후 ‘흔적 지우기’에 의한 재개발로 모두 헐리고 그나마 단 한 채 남아있는 것이라 했다.

이리저리 꼬불꼬불… 갈참나무 숲을 지나고 5층으로 연이어진 주택가 사이를 헤메다 드디어 찾았다. ‘김서방 찾기’에서의 첫번째 수확물이다.

김 안드레이 교수가 현지 승합차량 운전자와 골목 골목을 헤매다 간신히 찾아낸 신한촌 거리 2A에 있는 건물. 이곳은 현재 러시아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보존 상태가 영 엉망이다.

1928년대 소련 정책에 의해 떠밀려 신한촌을 이루고 살았던 한인들의 모습, 그 한인들을 교육시키고 언론을 통해 계도하려 했던 조명희 선생의 열정이 잠시 스쳐지나간다. 그 당시 한인들이 모여 살았을 땐 고려극장도 있고, 여러가지 문화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신한촌 서울거리 2A는 1911년 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호열자의 근절을 명분으로 현재의 빠그라니치나야 일대 ‘구개척리’의 한인마을을 강제로 폐쇄하고 러시아 기병단의 병영지로 삼으면서 생기게된 일종의 신흥촌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에 새로이 형성된 신한촌은 새로운 한국을 부흥한다는 뜻을 지닌 것이었고, ‘신개척리’라고도 불렀다. 이 일대는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차고 등으로 변해있어 이 집을 제외하면 한인들과 관련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에 지어진 건물은 1층 거주 공간과, 작은 창문이 난 2층 다락이 덧대어진 형태다.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집 앞에는 쓰레기더미가 잔뜩 쌓여있고, 관리상태가 영 엉망이다. 이 집까지 헐리게 된다면 신한촌의 옛 모습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답사단이 찾는 곳마다 마음 짠한 풍경들이 기다리고 있는 듯해 모두들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 기운을 눈치챘는지, 승합차량 운전자가 전망 좋은 곳으로 답사단을 모신단다.

한참을 달려 닿은 한적한 바닷가. 언덕배기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저 멀리 외딴 등대가 보인다. 그림같은 풍경이다. 그 그림 속으로 답사단은 빨려 들어갔다.

폭이 3∼4미터 쯤 될까. 좁다란 길이 해안에서 바다 가운데 겅중 떠있는 등대까지 이어져 있다. 고적한 그 풍경이 왠지 잔잔한 울림을 준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가 마음을 더욱 가라앉힌다.

승합차량 기사가 스킨스쿠버를 할 사람있으면 하라고 한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르지만, 공짜로 해준단다. 그 쓸쓸한 바닷가에 스킨스쿠버 장비까지 갖춘 차량이 있기는한데, 그 쌀쌀한 추위에 나서는 이가 있을턱 없으니 부러 한 농같기도 하다.

 

▲ 국경을 넘는 한인들. <우스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소장>

9월 4일, 우스리스크로 향했다.

전날 김일환 영사가 조언해준대로 우스리스크에 있는 ‘고려인문화센터’를 찾아가는 중이다.

김 영사가 소개해 준 남모 교수에 대한 섭외는 포기했다. 하루 가이드비가 250달러라고 한다. 하루 수고료로 큰 돈이기도 하지만, 더욱 마음을 찜찜하게 한 건 모양새였다. 조명희 선생 유족들이 자신들의 할아버지를 찾아가면서 큰 돈을 들여 길 안내를 받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빠지는 일이었다.

그보다 답사단이 느꼈던 씁쓸함은, 우리가 발굴하고 지켜야할 역사적 가치들이 ‘돈벌이’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우스리스크로 향하며 고려일보 편집국장인 김 발레리아와 통화했다. 그녀는 우스리스크에서 한국말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라 했다. 조금 어눌하긴 했지만 뜻은 통하는 정도. 김씨는 한인 이주사 150주년을 맞아 눈코뜰새없이 바쁘다고 했다.

가는 길에 조철호 단장이 답사단에게 조명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조 단장이 조명희 선생의 종손이고 보면 누구보다도 선생에 대해 꿰뚫고 있으리란 것은 당연한 일. 특히 조 단장은 조명희 선생의 재조명을 위해 몇 십년간 열정적으로 동분서주해온 터였다.

“포석 조명희 선생의 망명작가로서의 행적은 마포나루에서 시작됩니다. 1928년, 선생이 망명작가로 길을 떠나기 전 일제의 선생에 대한 강요와 회유는 아주 극심했었죠. 강원도 경찰국장으로 나가라, 강원도 지사를 하라며 큰 감투를 주고 출세길을 터 주는 회유책에도 선생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어요. 꼿꼿한 선생의 성품에, 누구보다 일제에 가장 강렬하게 저항해온 작가로서 그런 회유는 선생에게 치욕과 다름없었던 거죠. 선생이 망명한 후 집안꼴은 엉망이 됐습니다. 일제로부터의 탄압과, 그리고 해방 후 남북으로 갈린 뒤에도 연좌제에 의해 집안은 엄청난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집안 사람들 가운데에는 선생을 두고 ‘썩을 놈의 인간’이란 한숨과 푸념을 달고 산 사람들이 많았죠. 그만큼 풍비박산난 가족사였고, 선생은 그 후손들에게조차 영광스런 이름이 아닌 두려움의 흔적이었던 것이었어요.”

▲ 한인 이주 모습. 소련은 한인들을 콜레라 호열자 창궐을 명분으로 새 거주지인 ‘신한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우스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소장>

조 단장은 깊은 숨을 들이킨 뒤 말을 잇는다.

“그 분, 사과궤짝 책상 삼아 위에 신문지 몇 장 깔아 글을 쓴 분입니다. 연재 소설을 조선과 동아에 기고했는데, 꼬장꼬장한 그 분 성품에도 또 어려운 사람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대요. 원고료 가지러 가서, 집은 쌀이 다 떨어져 그 돈만 목 빼고 기다리고 있는데 빈손으로 오기 일쑤인 거예요. 오다가 차마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처지의 거지를 보곤 동정심이 동해 다 던져주고 왔다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천사같은 아내라도 참을 수 있겠나. 엄청나게 부인에게 혼나고, 그래도 어려운 사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 성품 고쳐지지 않고.”

선생과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조 단장은 전해준다. 선생의 절친이었던 김우진과 한설야, 이기영 등 교과서에서나 봄직한 인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튀어 나온다. 그렇게 듣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론 숙연하게 만든다.

“김우진씨는 목포갑부 아들이었죠. 동경에 유학하고도 돈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던 사람이에요. 조명희 선생의 가장 친한 친구가 그이인데, 그 분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해요. 두 분이 둘도없는 벗으로, 일본에서 연극 순회공연을 같이 벌였죠.”

김우진.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투신 자살했다. 절친의 죽음에 조명희는 통곡했고, 이에 대한 글도 남겼다. 조명희의 그 글은 2부에서 소개한다.

▲ 포석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에 관여했던 ‘선봉’ 신문.

조 단장의 증언은 이어진다.

“조명희 선생이 잠적한 것은 칠월칠석날이었어요. 허름한 옷으로 변장하고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서해로 빠져나가 중국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정작 조선에서는 선생의 망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어요. 선생과 가까운 카프계열의 작가들조차 말이죠. 막연히 북에 있을 것이란 짐작 뿐이었죠. 해방 후 조명희 선생이 월북한 것이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했다는 사실을 안 한설야 선생이 조명희 선생을 만나고자 연해주 지방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고도 합니다.”

 

조명희 선생의 제자이자 작가인 최 예까떼리나의 글에 의하면 선생이 러시아에 도착할 당시의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최 예까떼리나는 포석이 우스리스크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육성촌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제자였던 인물이다. 그는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남달라 후일 포석에 대한 다수의 글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은 몇 편밖에 없다.

그 후손들이 모스크바 등지에 살고 있어 답사단은 모스크바에서 최 예까떼리나의 손자인 황 안드레이(38)를 만날 수 있었다.

조명희 선생과 관련된 귀중한 자료들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맥이 그쪽이다. 왜냐하면 조명희 선생 관련 책자 발간을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이가 최 예까떼리나였기 때문이다. 답사단은 황 안드레이씨에게 포석 선생과 관련된 아주 작은 단서라도 샅샅이 뒤져 찾아봐 줄 것을 부탁했고, 황씨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 고려인문화센터 1층 전시실에 실려있는 항일투쟁 영웅 59인 조명희 사진. 이 사진은 포석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 당하기 전 수인으로 있을때 찍은 것이다.

 

최 예까떼리나의 남편은 황동민 교수다.

황 교수는 육성촌에서 포석을 만나 그의 인간됨에 매료돼 자신의 손윗누이를 소개해 주었는데, 그 사람이 포석의 부인 황명희 마리아다. 포석과 황명희 마리아 사이 자녀들이 조선아, 조선인, 조 블라디미르, 이렇게 세 남매다. 선아씨와 선인씨는 작고했고, 조 블라디미르는 이후 답사단과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나게 된다.<매주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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