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거룩한 스승, 인기있는 선생이었던 포석

▲ 현재 륙성촌장을 맡고 있는 안드레이 빅토르비치 비르코프(사진 오른쪽 두번째)씨. 우연히 륙성농민청년학교 앞 도로에서 만나 취재하게 된 그는 쁘찔로프카(륙성촌) 중학교 교사와 교장을 지낸 인물로, 륙성촌과 륙성농민청년학교의 역사는 물론 포석 조명희 선생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답사단원들이 김 안드레이(오른쪽 네번째) 교수의 통역으로 안드레이 촌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최 예까데리나가 남긴 글을 보면 스승 조명희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작가 조명희는 우리의 선생이며 거룩한 스승”이고 “륙성농민청년학교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선생”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글 속에는 자신이 스승 조명희로부터 배웠던 륙성농민청년학교와, 강제이주 전 고려인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던 륙성촌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술돼 있다. 최씨의 글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등탑봉’ 산 밑에는 넓은 벌이 있고 그 곁에는 맑은 호수가 있어서 조명희 선생이 우리를 배워주려고 지은 ‘소금쟁이’가 기억된다.

 

창포 밭 못 가운데

소금쟁이는

1 2 3 4 5 6 7

쓰고 노누나

바람이 불어서 어찌건만

그래도 소금쟁이는

1 2 3 4 5 6 7 쓰고 노누나

이 시는 조명희가 1928년에 소련으로 망명하여 육성촌의 산을 ‘등탑봉’이라 이름 짓고 그 곁에 있는 호수를 보면서 시 ‘소금쟁이’를 지은 것 같다. 조명희에게는 1929∼1931년이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창작의 시기였을 것이다.

그 당시 조명희는 혼자서 이정열 선생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문학담당 교원으로 일하면서 시, 수필, 장편소설을 집필하고 있었다.

이 노래는 훌륭한 문체와 음률이 있어 누구나 한번 들으면 금세 따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 봄이 온 세계를 살펴보며 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럴 때면 우리 선생들조차 조명희와 김호준이 봄과 같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만 같았다.

삐오녜르들은 아침 일찍 7시에 일어나 ‘등탑봉’ 산밑 학교에서 호흡체조를 하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육성촌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불렀다.

 

봄비에 나는 피여 장미화가 되었네

나는 곱게 자라나서 이 동산에 피려한다

이 나라는 봄나라 사시장춘 꽃피는

피고지고 지고피는 봄나라로다

이 나라는 봄나라 푸른 나라 따뜻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봄나라로다

 

이렇게 우리는 어린 시절에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었으며 앞으로 찾아 올 새 세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명희 선생은 학교 마당을 혼자 거닐곤 했는데 시를 짓거나 우리들의 앞날을 걱정하였으리라. 문학시간이면 선생께서는 새 동요를 지어 우리를 기쁘게 하였다. 때문에 우리는 늘 조명희 선생의 시간을 기다리었다. 그는 시를 지어가지고 마당으로 들어오면 그 시간에는 모든 학생들이 다 참석하였다. 그 시는 ‘어린 두 나무꾼’이었다.

 

밤빛이 기여드는 나무밭 사이로

물소리 높아지는 바위언덕으로

학교에서 배운 혁명가를 부르며

사랑이 뒤끓는 집으로 가자

 

그는 시를 잘 낭송하였다. 우리는 그의 음성을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그때 시를 읊던 얼굴이 앞에 보이는 것 같다. 조명희는 3년 동안 육성촌에서 일하였다.

이 기간이 조명희에게 있어서 자유로운 시기였다. 조명희는 김호준 선생과 같이 음악동화극을 쓰기도 했는데, 그들은 원동에 아동문학이 없는 것을 생각하여 ‘아동문예를 낳자’에 이렇게 썼다.

“사회는, 군중은 우리 어린 문단을 향하여 희곡과 서술을 다구. 시와 노래를 다구. 동요와 동화를 다구! 하며 손을 내민다.

그러나 이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약간의 시를 주었을 뿐이요. 그 외에 준 것이 별로 없다. 자란이가 예술에 주리었다면 어린이들도 주린 그대로 내버려두겠는가?”

이런 연유로 첫 동화극이 생기었다. 그러나 조명희는 자신의 이름은 감추고 김호준의 이름으로 ‘봄나라’를 만들었다. 김호준이 젊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일을 도와주려고 한 것이다.

‘봄나라’를 가지고 아동들을 위한 동화극을 완성해 나갈 즈음 육성촌의 제일 미인이라 불리던 최 아가피야와 채정숙은 학생들을 데리고 동화극을 연습하였다. <이하 생략>

- 1988년 11월 24일자 레닌기치에 기고한 최 예까떼리나의 글.

 

▲ 폐허로 변한 륙성농민청년학교 교실. 80년 가까운 세월동안 방치돼 교실 내부와 복도는 흉가처럼 바뀌었지만 그 외형은 튼튼해 아직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폐허가 된 륙성농민청년학교를 돌아보며 답사단은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하고 이런저런 감흥을 메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럴즈음 우연히 학교 앞 도로를 지나는 현지인을 보게됐다. 사람 구경하기 힘든 이 오지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답사단은 그를 불러세웠다

나이가 쉰에서 예순 쯤 돼보이는데, 마흔 다섯살이란다. 그러고보면 슬라브민족의 나이는 도통 제대로 알아채기 힘들다. 어림짐작으로 몇 살 쯤 됐겠다 싶으면, 대개 거기에 열 대여섯살은 감해야 제 나이가 나왔다.

안드레이 빅토르비치 브리코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소 뒷걸음으로 쥐를 잡은 격으로, 그는 륙성촌과 륙성농민청년학교의 역사에 대해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쁘찔로프카(륙성촌)에 거주하고 있는 촌장이었으며, 이미 옛날에 폐교된 륙성농민청년학교를 이어 도로 맞은편에 세운 쁘찔로프카 중학교에서 교사 생활 10년, 교장 생활 2년을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무뚝뚝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젊은 촌장은 상냥한 말투로 자신이 꿰고 있는 여러가지 사실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륙성농민청년학교는 한때 학생이 500여명에 교사들만도 20여명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 강제 이주 정책이 시행되면서 이 곳에 있던 고려인들은 모두 중앙아시아로 쫓겨나게 됐지요. 그 이후 우리 마을엔 군대가 주둔하게 됐답니다.

륙성농민청년학교는 군 부대 장교들이 쓰게 됐고요. 세련된 그 건물은 비싼 돈을 들여 튼튼하게 지었으니까요.

고려인들이 떠난 자리에선 당연히 고려인들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그들이 살던 집도 모두 불태우고, 그들이 경작하던 논밭은 잡초더미 우거진 황무지로 변해갔지요. 사진, 문서도 모두 불태워버려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물론 저도 조명희 선생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분과 관련된 당시의 자료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을 거예요. 1942년 군부대가 철수하고 주민들이 다시 들어와 살게됐는데, 들어와 보니 남은 것이라곤 폐허가 된 학교와 고려인들의 묘지, 그들이 쓰던 맷돌과 부서진 사기그릇 등속 뿐이었다고 합니다.

조명희 선생, 우리 마을의 자랑이시죠. 선생님은 한국 뿐만아니라 소련에서도 이름있는 작가셨고요. 선생님을 위한 작은 전시실이 바로 앞 쁘찔로프카 중학교에 마련돼 있답니다.”

▲ 1920∼1930년대 륙성촌에 살았던 고려인들 삶의 흔적들. 그들이 사용하던 자기와 그릇, 수저, 농기구 등속이 쁘찔로프카 중학교 조명희 전시실에 보관돼 있다.

듣던중 반가운 소리였다. 이역만리 러시아 오지의 이 작은 마을에서, 80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스탈린 정권이 무자비한 숙청과 강제이주 정책으로 철저하게 고려인 흔적지우기를 벌였음에도 아직까지 조명희 선생을 추억하고 기리고 있다는 사실이 답사단에겐 너무나 놀라웠고, 또 그들에게 감사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우스리스크와 륙성촌을 도는 일정을 빠듯하게 잡은 탓에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안드레이 촌장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촬영장비를 챙겨 도로 건너편 쁘찔로프카 중학교로 향했다.

▲ 륙성촌에 거주했던 고려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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