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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14>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14>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01.11 2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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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제예프가 황명희 여사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 조명희 선생이 끌려간 KGB 옛 건물의 감옥. 쇠창살문이 있는 지하 감옥에서 포석은 끝내 나오지 못한 채 총살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게됐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만찬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답사단은 조 블라디미르와 이장호 한인회장에게 우수리스크에서 확인했던 ‘항일 투쟁영웅 59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영광스런 명단에 포석 조명희 선생이 포함돼 있다는 이야기에 이 회장은 앞으로 포석과 관련된 일이라면 열일 제쳐두고 앞장 서 돕겠다고 약속했다.

한국 문학사에 있어 포석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폄하된 측면이 있었다. 이념적 대립이라는 양극단의 현실 상황이 ‘반쪽 부류들’만의 성과를 부각시켰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소위 월북작가라고 낙인 찍힌 이들, 또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작가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뤄진 이후에도 학자들과 평자들의 이들에 대한 접근이 조심스러운 ‘자기검열’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념적 편향성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민감하고 부담스럽고, 때론 위험스러운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찬 말미에 답사단은 조명희 선생과 관련된 몇 가지의 키워드에 대한 정리와 내일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포석이 총살형을 당하기 직전의 직함이 교수였다는 것까지는 알려져 있는데, 정확하게 포석이 교수로 재직한 대학이 어느 것이었느냐, 제자들 중에는 생존자가 있을 것인가(만약 생존해 있는 포석의 제자가 있다면 90세가 넘을 것이었다) 등에 대한 대답이 필요했다.

▲ KGB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계단.

 

포석이 교수로 재직한 대학은, 여러사람들의 증언을 포괄해 보면 하바로프스크보다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학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러나 누구도 어디에 소재해 있는 어느 대학이라고 특정해서 결론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추론해 보면 포석이 교수로서의 직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스리스크에서 교원들을 양성하는 사범대학에서 강의한 것에서 비롯됐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보였다. 교사였든 교수였든 그것이 포석의 삶에서 뭐 그리 중요하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 정확한 팩트(fact)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일 터. 게다가 교사로서의 역할과 교수로서의 역할은 그 질량에 있어서 많은 차이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를테면 그 당시 일제에 항거하고 소련에서 정착해 나가는 한인사회의 구성원들에 끼친 영향성이 직함에 따라 다를수 있다는 것이고, 그 영향성에 의해 한인사회의 모습이 달라진 결과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포석이 1930년대 연해주지역 한인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어떻게 자리매김 되었는지가 소소해 보이는 몇 가지의 팩트로부터 그 증폭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추후, 보다 면밀한 증거 수집을 통해 정확한 정리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내일 일정은 좀 빠듯할 것입니다. 9박10일 동안 포석 선생의 삶을 되돌아보는 우리 답사단의 여정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날이 될 것입니다. 우선 꼼소몰스카야 거리 52호에 있는 ‘작가의 집’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작가의 집은 우리 유족이 지난 1992년 방문했을 때 건물 외관만 남아 있고 내부는 다 헐린 상태였어요. 그 건물이 현재까지 보존돼 있는지, 아니면 모두 헐리고 그 터만 남아 있는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는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내일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요. 그 작가의 집에서 10여분 거리에 아무르강이 있어요. 작가의 집에 거주하셨을 때 선생께서는 아무르강까지 산책하기를 즐겨하셨답니다. 그 넓은 강을 보며 조국을 잃은 울분을 삼키고, 많은 사색과 상념을 하시며 작품을 구상하셨지요. 그 다음 포석 선생이 끌려가셨던 하바로프스크 KGB 본부를 찾아갈 것입니다. KGB 본부는 포석 선생의 마지막 모습, 수인(囚人) 사진을 입수하게 된 곳이기도 합니다. 옛날 선생께서 끌려가셨던 그 건물 그대로 현재에도 KGB 본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1992년 ‘조명희 카드’를 발견하게 됐는데요, 거기엔 사망 일자, 사망 원인, 머리를 깎은 모습의 사진 등이 게재돼 있었습니다. 사망 원인이 ‘심장이 뭉쳐서’라고 돼 있는데, 총살형을 당한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죠. 소련이 자신들의 ‘흑역사’를 지워버리는 작업을 했음에도 그런 기록물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만찬을 끝내며 조철호 단장이 내일 일정을 설명하며 다시 한 번 힘을 내자고 격려해 주었다.

 

▲ 아무르강을 끼고 있는 하바로프스크 도심. 트랜스성당과 광장 너머로 보이는 아무르강의 풍경은 특히 아름답다.

조석 조명희 선생 삶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하바로프스크(Khabarovsk)는 아무르강을 끼고 있는 깔끔한 도시다. 그러나 답사단에게는 포석의 잔영이 투영되었던 탓일까, 우울한 곳으로 다가온 곳이다.

하바로프스크는 러시아 연방 동쪽 말단에 있는 하바로프스크 지역의 행정중심도시이다.

아무르 강이 우수리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약간 하류 쪽에 있다. 17세기 중엽 아무르 강 유역을 여러 번 탐험했던 러시아 탐험가 E.P. 하바로프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다.

현대적인 도시는 1858년에 군사전초기지로 세워졌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아무르강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있는 요충지로 소비에트 체제하에서 줄곧 극동 지방의 중심지였으며, 한때는 베링 해협까지 이르는 극동 지방 전역을 관할하기도 했다. 아무르강 쪽으로 가파르게 경사진 산등성이와 작은 골짜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름다운 강변 공원과 산책로를 갖추었으며, 단층 목조 주택들이 나란히 있어 독특한 경관을 형성한다. 주요한 산업 중심지로서 대부분의 산업은 상류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인구는 59만3636명 (2013년), 면적은 386km².

극동 연방관구의 본부가 있고, 러시아 최동단 지역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아무르강이 있어 이 도시는 빛난다. 강이 있는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 도시는 잘 보여준다. 고풍스런 건물들이 아무르강을 바라보며 줄지어 있고 많은 고원과 강을 따라 산책하기 좋은 오솔길이 한적한 여유를 갖게 한다. 극동의 역사를 간직한 시내는 관광객의 시선을 이끈다.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경유로는 8523km의 지점에 있고 모스크바와 7시간의 시차가 있다.

중국과의 거리는 30km이다.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의 합류점에 있는 대우수리섬은 중소 국경 분쟁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영유권을 서로 주장하고 있었다. 2004년의 국경 확정 문제는 대우수리섬이 러시아와 중국의 공동 관리에 합의했기 때문에, 하바로프스크에 대한 국경 문제는 거의 완벽하게 해소되었다.

주민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우즈벡족, 유대인, 고려인 등 여러 민족이 거주한다.

 

9월 6일 토요일, 답사 5일차.

답사 일정의 절반밖에 소화해내지 않았는데 퍽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포석 조명희 선생과 관련된 일정 대부분이 연해주 지역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강행군으로 일관했다는 이야기다.

힘든 만큼 보람도 있었고, 어깨를 짓누르는 고단함의 무게만큼 뿌듯함도 있었다. 그러나 포석 선생과 관련된 유물이나 저작물 등 포석 기념관에 전시할 물품들을 많이 확보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기사 그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스탈린 정권의 흑역사 지우기 작업이 그만큼 철저했고, 삶과 죽음이 오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포석의 가족들이 선생의 유품(선생이 KGB에 끌려갈 때만 해도 곧 돌아올줄 알았으니 유품이라고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지만)을 챙길만한 정신은 없었을 터였다.

다만 답사단은 선생께서 살다가신 그 길을 샅샅이 되짚어 선생을 기릴만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있다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선생이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살았던 ‘작가의 집’을 찾아가고 있다.

주소가 꼼소몰스카야 거리 52호로 돼 있는데 그 주소가 정확한 지도 모른다. 더욱이 조 단장과 유족들이 1992년 작가의 집을 찾았을 때 건물은 폐허처럼 돼있었다고 한다. 기대감과 불길함을 함께 안고 그 집을 찾아가고 있다.

가는 길에 김 안드레이 교수가 작가의 집과 포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조명희 선생과 가족이 작가의 집 2층에 살고 있었는데, 그 옆집에 알렉산드르 파제예프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파제예프는 러시아 교과서에 실린 인물로 유럽 학생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현재까지도 유명한 작가입니다. 그가 포석을 소련작가연맹원으로 추천했지요. 포석은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작가연맹원이 되었고요. 제가 타시켄트대학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꼈던 자부심은 조명희 선생이 파제예프와 동격(同格)이거나, 오히려 그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조선아씨)로부터 그와 관련된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포석 선생께서 비운의 최후를 맞게 되고, 그로부터 10년 뒤 외할머니(황명희씨·포석의 부인)는 파제예프를 만나게 됩니다. 파제예프는 황명희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춘 뒤 절을 했다고 합니다. 고려인의 풍습에 따라 그대로 예를 표한 것이죠. 파제예프는 포석이 총살형을 당한 것도, 그 유족들이 강제 이주 당한 뒤 우즈베키스탄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지요. 그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남편에 대한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한 황명희 여사에게 굉장한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 파제예프는, 그 당시 그런 비극을 겪은 가정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비극적 가족사를 딛고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한 어머니에 대한 경의를 바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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