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 보내고 싶은 대학이면 다른 사람도 오고 싶겠지요”

 

오늘날 ‘가업(家業)을 잇는다’는 말을 쉽게 하지도 듣지도 못한다.

후대는 고사하고 당대에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는 요즘 세상사의 모습이다.

‘이스트먼 코닥’ ‘GM’ ‘리먼브러더스’ ‘K마트’ 등…….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창업 100년이 넘는 글로벌 기업들이 2000년 이후 파산 혹은 쇠퇴의 길을 걸어 100년 영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창업주는 바뀌었더라도 100년 세월동안 어떤 경쟁자도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글로벌 기업들이었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기업은 물론 많은 대학들까지 외부환경에따라 ‘퇴출’이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에 처해있는 것이다.

청주대는 한수이남(한강을 경계로) 최초로 설립된 4년제 대학이다.

김윤배(51) 총장은 이를 ‘정정’하겠다고 했다. 한수 이남은 물론 이북을 통틀어 ‘광복 후 4년제 신설 1호 대학’ 임을 강조했다.

청주대 설립자는 청암(淸巖) 김원근(1886~1965)·석정(錫定) 김영근(1888~1976)형제다. 이들의 손자인 김 총장이 학교를 이끌고 있으니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근래 보기 드문 대를 잇는 ‘장수대학’이다.

형제는 일제 강점기 온갖 역경에서도 큰 재산을 모아 교육 사업에 모두 바쳤다.

청암은 1924년 대성보통학교를 설립한다. 이후 1935년 청주상업학교(이후 청주상고와 대성중으로 분리) 1945년 청주여자상업학교를, 이후 광복 후 최초의 4년제 신설대학으로 1947년 청주상과대학을 설립한다. 이어 대성여자중학교(1959)와 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1960)를 잇따라 세워 인재양성에 힘썼다.

청주대와 5개의 초·중·고교로 출발한 대성학원은 청석고등학교가 세워지면서 7개 학교로 구성된 청석학원이 됐다.

청석고는 김 총장의 부친이며 청주대 3대 총장을 역임한 김준철 전 총장이 1970년 설립했다.

학교법인 청석학원은 1월 23일 청주대 김윤배 총장을 8대 총장으로 다시 선임했다. 김 총장은 재선(8년)의 임기를 마치고 1월 27일 3선 임기에 들었다. 이튿날인 29일 오후 우암산 자락에 자리 잡은 대학은 조용하면서도 한유로웠다.

그가 처음 총장후보로 나섰던 2001년 12월은 꽤나 시끄러웠다.

청주대 이사회로부터 6대 총장으로 선임된 신임 총장에 대한 교수협 등의 반발은 거센 폭풍우를 동반했다. 재선에 성공한 2006년 1월도 청주대 캠퍼스는 총장취임 반대운동으로 어지러웠다. 교내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도 ‘연임축하’ 대신 ‘비난’ 일색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분위기가 달랐다.

‘3선’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내 걸렸다. 교수와 직원일동의 이름으로….

-축하드립니다. 3선이시죠.

“청주대 3선은 처음입니다. 충청대 정종택 총장님이 4번째로 연임했고, 4년제는 처음이지요. 전국에서는 한양대라든지 몇 개 사립대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잡음은 없었습니까.

“잡음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축하 플래카드가 안 떨어지고 계속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가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웃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이번에는 교수와 직원들의 전폭적 지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인정하고 평온하게 잘 (총장선임이) 진행 됐지요.”

-3선까지 하게 된 배경이랄까 비결이라도.

“비결보다는 글쎄, 앞 질문에 전에는 잡음이 있었다는 것 같은데, 처음에는 서로 이해가 부족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동안 8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상대를 알고 이해하려했고 또 싸우면서 정이 싹트고 신뢰감이 쌓였나 봅니다. ‘저 사람한테 맡기면 최소한 어려운 대학이라도 망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있으니 100%는 아니더라도 서로 인정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도 위기가 닥치면서 CEO형 총장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과거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지요. 지금은 앞으로 대학이 어찌 될지 모르니 위기의식을 느껴서 이를 극복하고 생존하는 것이 제일 큰 관심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지난 8년간 많은 일을 하셨는데 보람으로 간직하고 있는 일이 있는지요.

“무엇보다 구성원간의 화합을 꼽을 수 있지요. 젊은 나이에 총장을 나서게 된 것도 대학의 진로를 생각했습니다. 청주대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앞으로 다가올 위기를 소모성 논쟁으로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해 전면에 나서게 됐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수출을 해서 먹고 사는 나라인데, 그 수출을 누가 합니까. 그 인재를 키워내야 합니다. 구성원, 학생들을 국제화 안목에 맞추는데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 일환으로 국제 표준이 되는 시설을 준비했고, 행정도 국제기준에 맞춘 ISO9001 인증을 받도록 했습니다. 2001년에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확대돼 20개 프로그램으로 300명씩 해외에 보냈습니다. 다음으로 외국유학생 유치활동을 벌였죠. 2004년 3월에 74명의 중국유학생이 우리 학교를 입학하는 첫 결실을 맺고 기뻤습니다.”

-외국인학생이 얼마나 되나요.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 학생은요.

“2008년에 교육부로부터 외국인대학원 유학생 한국어 연수 기관으로 선정됐습니다. 이 학생들은 국비유학생인데 이들까지 포함해서 35개국 1400여명이 재학하고 있습니다. 다수가 중국학생이지만 아프리카 남미, 동유럽 유학생도 있습니다.”

-외국학생들이 많은데 외국인 교수는요.

“글로벌 대학을 추진하면서 역점을 뒀던 부분이 우리 학생들을 해외 내보내고, 해외유학생을 유치하는 외국어교육에 중점을 뒀습니다. 아마 4년제 대학으로는 최초로 중국어 회화 과목을 교양필수로 지정해 꼭 들어야만 졸업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영어, 중국어, 일어, 독어, 러시아어를 담당하는 원어민교수들이 50여명 있습니다. 전임교수 중 외국인 비율이 13% 정도 되는데 올해 10여명을 더 채용할 계획입니다.”

-새로운 학과도 생겼지요.

“2008년에 간호학과와 치위생학과를 개설했고, 지난해에 방사선학과 유치, 의료경영학과를 설치했습니다. 최근(1월 14일)에는 군사학과(전국 4개 대학 선정)를 유치했습니다. 군사학과는 4년 전액 장학금을 정부에서 받는데다 졸업과 동시에 초급장교로 임관하게 됩니다. 학생은 올 연말 뽑아 내년에 개강합니다.”

-청주대는 부자(富者)지요.

“적립금을 두고 얘기 하는것 같은데 돈 때문이 아니라 교수들이나 학생들이 실력이 뛰어나 그런 말 하는 것 아닌지요.” (취재진도 함께 한바탕 웃었다)

-대학 적립금이 어떻게 마련됐습니까.

“전국 10위 안에 드는 규모입니다. 2000억여원 되는데 초창기에는 많지 않았습니다. 발전기금, 장학기금 등으로 시작된 것인데 97년도 IMF 당시 은행돈을 빌렸으면 28~30% 가까운 이자를 물었었습니다. 청주대는 은행에 예치했기 때문에 이자가 거꾸로 눈덩이처럼 늘었죠.”

-IMF 이전 적립금은 얼마였나요. 어떻게 사용됩니까.

“당시 학교에 없었기에 잘 모르겠는데 400억~500억원 정도 됐나요? 적립금 이자는 계속 저축하고 일부는 시설투자 등으로 사용했고, 또 일부는 적립하면서 계속 굴러 가지요. 미국 하버드대 경우는 몇 십조원을 운용합니다. 청주대는 적립금 운용을 안전위주로 비교적 잘해왔습니다. 2008년도에 주식이 호황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도 사립대학들이 기금을 펀드라든가 주식에 투자하는 길을 열어주고 장려도 했는데 청주대는 제1금융권 밖으로 투자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계 경제위기로 주식시장이 폭락해서 다른 대학들이 몇 백억까지 손실 났다는데도 청주대는 한 푼도 손실이 없습니다.”

-장학금 규모는.

“종류로는 120여개로 150억원 정도가 지난해 장학금으로 지급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재학생의 42% 정도가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우수학생에게는 전액 장학금에다 기숙사비, 해외연수비, 책 구입비 지원 등 파격적인 장학금을 만들었습니다.”

-대학 정문 땅을 매입했다지요.

“80년대부터 추진했던 건데 정문 옆에 (옛) 한국도자기 공장부지(3000평)를 지난해 연말 매입했습니다. 교문을 역사에 걸맞게 새로 짓고, 진입로도 확장하고, 남는 부지는 학교와 지역발전을 위해 계획을 세울 생각입니다.”

인터뷰 중에 청석학원 설립자인 청암·석정 선생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두 분의 동상은 청주대 교내에 건립돼 있고, 사진은 총장집무실과 접견실 두 곳에 걸려 있다. 손자인 김 총장을 늘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설립자 말씀 좀 해 주시죠.

“두 분 설립자 형제분께서 일제 식민지하에서 배워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신념으로 교육 사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 시작이 1924년 대성고등학교 설립이죠. 그 후 35년도에 청주상업학교(청주상고와 대성중으로 분리) 그리고 여성 교육을 위해 대성여상과 대성여중을, 47년도에 청주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청석학원 산하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7개 학교가 있고, 여기서 20만명의 인재를 배출했습니다.”

-총장직을 수행하다보면 어려운 일도 많을 텐데 할아버지를 늘 가까이 대하시면서 도움을 청하는 등의 기도라도 하는지요.

“할아버님들이 어려운 시기에 육영사업을 했던 그 생각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두 분이 설립한 학교가 더 발전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늘 제가 있는 것 같고요.”

-아무래도 학생 모집이 어려운 문제죠.

“최근 대학 신문에 충원율 100%를 채우지 못한 대학이 80곳이 넘는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청주대는 최근 3년 연속 100% 등록률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가 걱정이죠. 올해 초등학교 2학년 올라가는 학생들이 47만명입니다. 지금 대학정원이 60만명 정도인데 향후 10년이면 13만명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더욱 어려운 것은 2005년도 통계를 보면 한국의 고등학교 졸업자 83%가 대학을 진학하는데 미국은 63%만 대학에 진학합니다. 일본은 대학진학률이 고교졸업생의 49.7%에 불과합니다. 지금 초등생 47만명이 대학에 올 때는 약 절반인 23만명 정도가 진학을 예상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동문이 배출됐는데 그들과의 관계는요.

“청주대 동문이 7만3000명 정도입니다. 총장에 취임하고 아쉬웠던 분야 중 하나가 학교와 동문들 간에 유기적인 관계, 그 통로가 안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문들을 찾았습니다. 그분들이 학교발전기금과 장학기금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청주대는 2캠퍼스 이전계획 등은 없나요? 영동대가 시끄러운데.(영동대학교가 충남 아산으로 캠퍼스 이전을 추진하자 지역사회가 반발하고 있다)

“오송첨단복합단지가 결정되기 전 오송 의료과학단지내 연구단지로 10만평이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가 추진했던 오송 캠퍼스 부지가 그곳(첨복단지)으로 편입되면서 무산됐는데 앞으로 제2의 오송단지가 조성되면 참여할 계획입니다.”

-본인의 의지나 능력에 의해 지금 이 자리(총장)에 있겠지만, 부친이나 할아버지의 후광을 얻었다고는 생각지 않는지요.

“두 분 (설립자) 사진이 걸려있는데 설립자와 아버님이 안계셨다면 인연이 없었을 것입니다. 청주대와 청석학원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제일 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 하나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분 설립자께서 어렵게 세우신 학교를, 또 지난 50년 동안 아버님께서 몸 바쳐 발전시킨 학원을 더욱 성장시키는데 일조해야 되고,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친께서는 건강하신지요. 언제 총장을 하셨죠.

“88세이신데 건강하십니다. 1989년부터 93년까지 3대 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아버님 보다 더 오래 재직하게 됐네요. 그동안 많은 성장을 이뤘죠.

“시설 등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무형의 어떤 것도 채워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시설 면에서는 지난 8~9년간 2000억여원을 투입해서 사회과학대학부터 인문대학, 예술대학 신관, 대학원, 법학대학, 새천년 종합정보관, 또 외국인 교수아파트, 유학생시설 등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1200명을 수용하는 우암마을(2004년)을 설립했고, 작년에는 740명 수용하는 기숙사, 49명이 사용하는 교수아파트도 신축했지요. 산학협력의 산실이 될 미래천년관을 작년에 완공했습니다. 군사학과 설치에 밑거름이된 학군단 건물도 30억원 투입해서 구조변경을 했습니다.”

-많은 시설이 세워졌는데 시민들이 애용할 수 있는 공연장 등의 계획은.

“그동안 교육시설 확보에 주력했는데 다목적 체육관을 건립하려 합니다. 올 연말이나 내년 초 목표로 설계 중에 있습니다. 시설은 지역 행사 때 시민들이 같이 쓸 수 있는 공간이 되겠지요.”

-규모는요.

“계획으로는 4000~4500명의 고정석과 이동석, 또 플로어에 이동식 좌석으로 하려 합니다. 위치는 학교 쪽에는 고도제한 때문에 할 수 없고, 율량 택지지역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1년 총장 첫 취임 당시 좀 말씀해 주시죠. 지금과 달리 시끄러웠잖아요. 학위 문제인걸로 아는데.

“그 문제는 언론에도 많이 다뤘던 문제입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그때 청주대에는 정치외교학 석사과정이 없었죠. 영국에서 석, 박사 통합과정을 다녔습니다(영국 HULL 대학).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지요.”

-그때 교수협의회인가요? 교육부 감사에서 지적을 당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교수들이 주장했던 내용이 무엇이었나요?

“내가 직접 감사를 받은 게 아니어서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서울에 친구 분이 많은가요?

“아시다시피 초, 중, 고를 청주서 다 나왔고, 대학을 서울서, 군대를 장교로 청주 공군비행단에서 복무한 후 86년도에 영국으로 떠나 7년 반 있다가 오다보니, 대학 친구들 만날 기회가 많지 않군요.”

-청주서에는 많은 시선 때문에 서울에서 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서울서 술 마시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지요. 그건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인데요. 서울 출장 등에서 저녁식사를 하다보면 반주 한 잔 하잖습니까. 그러다보면 오후 8~9시께 끝나서 청주에 오면 밤 11시 정도 되니 서울서 술 먹고 왔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보직교수나 구성원들이 피곤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결제나 재량권이 간부들에게 없어서 들리는 얘기 같은데.

“8년 전 총장이 됐을 때는 젊기도 하지만 배우느라고 하나하나 보고 받고, 또 건성으로 넘어가지 않고 하나하나 꼼꼼히 봤습니다. 업무가 파악되고 익숙해진 후로는 사안에 따라 부총장을 중심으로 처장, 팀장에 위임해 전결 처리하고 있습니다.”

-돈은 어디까지.

“처음 취임 때는 1원도 총장 결재였습니다. 지금은 300만원까지는 부총장이, 그 밑으로도 얼마 얼마 있습니다.”

-좌우명은요.

“아프리카 속담인가 있는데,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을 좋아하고 지금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아마 혼자 빨리 가려고 했다면 오늘날 이렇게 되지 않았고, 답답하더라도 같이 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는.

“결혼이 늦어서 큰애가 올 중학교 3학년이 되고,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됩니다. 아이들 말이 나와서 말씀인데 누구보다도 학부모의 입장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 구성원들한테 늘 강조하는 것인데 ‘내 자식을 청주대에 보내고 싶다면 다른 사람도 보내고 싶을 것이고, 내 아들딸을 보내고 싶지 않다면 다른 사람도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학교 운영철학 같네요.

“거창한 것보다 내 자식이 오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도 오고 싶고 가고 싶겠지요.”

(총장의 다음 일정 때문에 비서진이 시간이 됐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왔다.)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4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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