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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무영선생 미망인 고 일 신 여사
소설가 이무영선생 미망인 고 일 신 여사
  • 동양일보
  • 승인 2010.04.12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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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무영의 아내’ 되고 싶다”
 

고일신 (高日新)여사는…

△1915년 10월 1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에서 출생 △출생이후 가톨릭에서 영세. 본명 ‘안나’△경애초등학교 졸(1927) △1936년 6월 11일, 당시 동아일보 기자이자 소설가였던 이무영과 결혼(주례.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 △1937년, 장녀 자림 출생(현재 미국거주) △1939년, 장남 현 출생(현재 미국 거주) △1941년, 차남 민 출생(2007년 4월 11일 병사)△1945년, 차녀 성림 출생 △1947년, 3녀 미림 출생 △1950년, 4녀 상림 출생 △가톨릭 꾸르실료(심신운동단체)부주간 △1970~2000년 피정강의를 겸한 해외여행 수차례(미국·남미·유럽 등) △청담성당에서 신도회장. 노인학교 개설 등 40년간 활동. △서울 강남구 청담동 65 진흥아파트 5동 1007호 △☏ 02-3443-8171.

올 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강산에 연둣빛이 돌고, 여인들은 거울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정녕 이 나라의 봄은 신이 내린 축복이다. 청주를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풍경이 봄 햇살에 더 없이 화사롭고 눈부시다. 강남구 청담동 진흥아파트를 돌아 들어가는 야트막한 산 아랫도리가 만개한 개나리로 마치 노란 스커트를 두른 듯싶다. 이 아파트 5동 10층에 95번째의 봄을 맞고 계실 ‘문학소녀 할머니’를 찾는 만년기자의 가슴이 조금씩 설렌다. 우리의 방문이 반가움일까, 오랜 세월 겨우 아문 상처를 느닷없이 건드리는 불청객일까.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셋째따님 미림(63)씨의 안내로 들어 선 우리는 아파트 아래에서 눈 익힌 노란색 한복을 곱게 입은 고일신 여사를, 언제나 그렇듯 곱고 조용한 미소의 ‘90대 소녀 할머니’ 의 밝은 표정에 비로소 안도한다. 그러다 잠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신다. 손님맞이에 손을 보태려 들린 막내 따님 상림(60)씨와 미림씨 자매가 크게 웃으며 “엄마가 왜 방에 들어갔다 나오신지 아세요?”라 묻고는 “옷고름에 저 것을 꽂고 나오셨어요”라 일러준다. 그때야 우리는 옷고름에 색이 바랜 장미 한 송이 장식 핀을 옷고름 마디에 꽂고 계신 것을 본다. 노란색 한복과 생화를 말려 만든 장미꽃 장식 핀-그렇다. 우리의 ‘사모님’ 고일신 할머니도 96세 할머니 이전에 한 여인으로 예쁘게 단장하고 싶으신 것이다.

이무영 선생은 50년 전 이 4월, 4.19학생혁명의 함성이 채 사라지지도 않은 이틀 뒤 돌아 가셨다. 친구부인의 빈소를 다녀와 오후 3시쯤, 부인과 몇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쓰러지고, 오후 4시 반쯤 운명했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나이 52세였다. 며칠 있으면 50주기다. 나는 오는 22일의 ‘무영제’와 ‘무영문학상’시상식을 앞두고 ‘미망인 50년’의 고 여사님의 심경을 조심스레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슬몃 엿보고자 뵙기를 청했었다. 5,6년 전부터 왼쪽 귀가 잘 안 들려 보청기를 쓰고 있지만, 조금 목소릴 신경 쓰면 대담엔 별 문제가 안됐다. 건강상태며 기억력이며 물음에 답하시는 억양이나 적확한 어휘구사에 빈틈이 없으시다. 3년 전 이 4월에는 둘째 아드님을 잃으셨다. ‘무영제’ 때면 어머님을 모시고, 버스를 대절하는 등 문인들의 편의를 돕던 조용한 성품의 아드님 이셨다. 이런 저런 가슴 저림을 알까싶어 감추고 계신데다 눈이 밝고, 신경이 예민한 분임을 알고 있는 터라 시종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다.

-사모님에 관한 웬만한 내용은 알고 있으나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하루를 어떻게 소일 하시는지요.

“눈 뜨고 일어나면 매일 성당 가는 것이 일이예요. 6시엔 일어나 침대 위에서 한 시간쯤 팔다리와 몸을 풀고 식사 후 10시 미사를 가지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오후 3시엔 묵주기도를 꼭 하지요.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를 열심히 하지요.”

-매일 기도를 열심히 하신다는데, 그 기도 중에 특별히 올리는 이름이나, 소망하시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성모님께 다 맡기고,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하시라고 하는 것이지요. 성모님께 많이 기도해요. 부족함 없이 사는 것에 감사하는 것 밖에 없어요. 딸들도 효성이 깊어요. 함께 있는 얘도 그렇지만, 막내도 그냥 허구헌날 먹을 것 해서 가져오고, 성당에도 데려다주고 산천구경 시키느라 신경 많이 쓰곤 합니다.”

-성당엔 언제부터 다니셨는지요

“나는 날 때부터 다녔어요. 내 고향 황해도 장연이 우리나라 가톨릭이 들어오는 길목이었어요. 그래서 부모님들 때부터 다녔어요. 이곳에 와서도 50년도 넘었어요. 지금의 청담성당도 한 40년 다녔어요. 성당 세워지기 전엔 밭이었고, 공소였을 때부터 다녔지요. 그러다가 성당 서둘러서 짓고, 성당 지으면서 회장이니 뭐니 하면서 회장노릇도 하고, 앞장서서 성당 짓고 레지오도 하고 노인대학도 만들고 하면서 위문품대도 만들어서 보내고 했지요. 지금 성당은 첫 번 짓고 허물고 두 번째 진 것 이예요. 다 앞장서서 했지요.”

-그동안 열심히 사셨지요? 이무영 선생님이 워낙 타협을 모르고 청렴하게 사셨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자식들 어렸을 적엔 돈이 없어 옷을 다 만들어 입히셨다더군요.

“저는 돈이라는 것을 1원도 못 벌어봤어요. 그래서 남편 살아있을 때 늘 말했어요. 당신 먼저 죽으면 나 거지야, 먼저 죽지 마. 그랬었지요. 그러다 혼자 돼서, 그래도 어떻게 해요. 그때 집하나, 서울 약수동 집하나 가지고라도 있었어요. 그거 가지고 어떻게 하면서 살아온 게 여태까지 살았고, 겨우겨우 청담동 AID 사면 월세가 얼마씩 들어온대서, 그때 2000만원 갖고 샀어요. 거기서 월세 받아서 애들 공부시키고 살았어요. 나중엔 하느님께 그것도 바쳤지요. 명동성당에 냈더니, 부활 때나 성탄 때나 계란 가져오시고….(웃음)”

-돈은 1원도 못 버셨지만, 1원도 낭비 하시지 않으셨겠지요?

“낭비 할 일도 없지요. 그 시대는 모두가 가난했고, 알뜰했지요. 일부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았지만 나는 늘 남편과 자식들이 자랑스러웠지 그런 것들이 부럽지 않았어요.”

-이렇게 봄도 되고 했는데, 문득 가보고 싶은 곳이나 만나고 싶은 사람 있으실 텐데요.

“가고 싶은데 하나도 없어요. 만족하고 만족해서, 어저께도 워커힐 가서 점심 먹고 산책하고 다니고, 어디든 놀러 매일 가니까 더 바랄게 없을 정도예요. 친구들도 다 죽고, 나이가 워낙 많으니까요. 성당에서 주일마다 많은 친구 만나는 게 기쁘지요.”

-돌아가신 분들 중 이무영 선생님 친구 분이나 누구들 중 가장 떠오르는 분은?

“무영의 어릴 때 친구인 이흡 시인은 단칸방 우리 부부 사는 곳에 비집고 살다시피 했어요. 김광섭, 이하윤, 모윤숙, 구상씨 같은 문인들이 절친했지요. 문인들 모임에 여자들은 나오는 이가 없는데 저는 왜 그랬는지 스스럼없이 잘 나갔어요. 우리집에서 함께 숙식하며 글을 배운 옥천이 고향인 유승규(농민 소설가)씨 등 이젠 다 저 세상에서 함께 어울려 살고들 있으시겠네요.”

-이 아파트에서 최고령인가요?

“얼마 전 100세 할머니 돌아가시고 우리 성당에서도 90넘은 사람 없어요. 난 만으로 95살 이예요. 우리 엄마가 ‘잰 40도 못산데’ 그랬었는데 이렇게 오래 사네요. 하느님께서 복도 많이 주셔서 항상 감사하는 것 뿐 이예요.”

-기도를 하시거나, 하시러 다니시는 일이 건강관리를 하시는가요?

“특별한 관리는 하지 않지만 아픈 데가 하나도 없어요. 무릎이 조금 아파서 걷는 것만 좀 신경을 쓸 뿐 이예요. 치아도 좋아서 먹는 것도 문제없어요. 딸들이 질긴 것 있으면 내가 먹어요. 잘 먹지요. 걱정 근심이 있을 리가 없지요. 하느님이 축복 주셨지요. 성당 오래 다니고 나이 먹었으니 보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반갑다고 하시더군요. 감사, 감사한 일이지요” (옆에 있던 따님이 이웃사람들이 엄마를 ‘감사 할머니’라 한다고 알려 준다)

-지금까지 90여성상 사시면서 감동스러웠던 일로 기억되는 것 몇 가지 있으시다면…

“무영선생이 여러 차례 상 받고, 남들에게 대우받는 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애들도 다들 제 공부들 잘해서 하나도 걱정이라는 게 없고, 특별한 자랑도 없고 사는 게 그냥 그런가보다 했지요. 그런데 무영이 가고 무영을 기리는 일들이 계속돼서 여간 감사한 게 아니지요. 음성의 여러분들이나, 각별하게 무영을 기리는 행사를 계속해 주는 동양일보나, 생전에 아꼈던 분들이나, 무영의 작품을 평가해주는 분들의 노력이 해마다 나를 행사에 참석하도록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지요. 그게 감동스럽지요.”

-무영선생님 작품 전체를 여러 차례 읽으셨다는데, 전체 작품 중에 제일 좋았다는 느낌의 작품이 있다면…

“특별히 꼽으라면 ‘제1과 제1장’이지요. 바로 우리 삶을 쓴 것이거든요.”

-모든 게 만족스럽고 감사하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특별히 마음 아픈 일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무영이 돌아가셨을 때지요.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돌아가실 때 경제적으로는 어렵고, 글은 잘 써지지 않고, 문단은 갈등이 심했고, 사회도 혼란스러웠고 잠자리에서도 잠을 못 이루고 끙끙 앓았어요. 죽음이 예감됐는지 사진도 크게 찍어다 앞에 놓고 글을 쓰기도 하고, 칼럼에 ‘무영 죽다’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쓰기도하고…, 대학생 셋에 중·고등학생이 둘이었으니 죽을 지경이었지요. 무영은 친구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 죽은 셈치고 부의금 좀 미리 줄 수 없느냐’고 했데요. 정말 그 말대로 부의금으로 아이들 학비를 줬어요.”

-4월이 되면 봄도 되지만, 무영선생님 잃은 달이라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요.

“세월이 하도 가서 이젠 고마운 생각만 나지요. 50년인데, 만 50년이예요. 슬프거나 섭섭하거나 하는 것들 다 결이 삭았어요. 모든 분들이다 잘해주셔서 고맙기만 하지요.”

- 다시 태어난다면 그래도 문인의 아내가 되고 싶으신가요?

“그럼요. 내가 다시 태어나도 ‘무영의 아내’ 되어야지요.”

-모든 이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가족들은 하느님한테 더 감사했으면 좋겠고, 또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뜻을 알아주길 바라지요. 하느님께서 허구헌날 이렇게 햇빛 주시고 하는데 감사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무한하신 사랑을 어떻게 다 말해요. 모든 것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지지요. 고맙게 받아들이면 모든 게 감사할 따름이지요.”

-고맙습니다. ‘무영제’ 때 뵙겠습니다.

 ▶ 대담·글/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 기록/오상우 사진/임동빈

 이무영(李無影)선생은… △아버지 이덕여(李德汝). 어머니 인(印)씨 사이 7남매 중 차남으로 충북 음성군 음성읍 오리골서 태어났다. 본명은 갑용, 아명은 용구. 본관은 경주다. △5세 때인 1953년 충북 중원군 신니면 용원리 26으로 이사 했는데 이후 이곳이 본적지가 된다. 이 때 이웃마을인 신의실에 살던 이흡(李洽. 시인으로 활약하다 6.25때 행방불명 됨)과 서울에서도 의형제처럼 다정히 지냈음. △17세 되던 1925년 일본에서 문학잡지 ‘문학시대’ 편집간부였던 작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의 문하로 들어가 기숙하며 4년간 작가수업. △18세되던 1926년 6월, 조선문단에 단편 ‘달순의 출가’ 당선. 이듬해인 1927년 5월 첫 장편 ’의지할 곳 없는 청춘‘간행. △1929년 귀국하여 강습소 교원, 출판사 사원, 잡지사 기자를 하다 장편‘8년간’을 ‘조선강단’에 연재, 이때부터 ‘무영’(無影)이란 아호를 필명으로 사용. △23세 때인 1931년 동아일보가 한국최초로 공모한 희곡현상모집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이 당선.(이 작품은 이산(李山)이란 이름으로 응모했으며 뒤에 극예술연구회에서 공연) △26세 때인 1934년 동아일보 학예부기자로 근무. △1936년, 동아일보광고국에 근무하던 신영균씨가 처제 고일신을 중매하여 결혼. △1939년, 창작 전념 위해 동아일보 사직후 친구 이흡이 살고 있는 경기도 군포 궁말 옆 샛말(경기도 시흥군 의왕면)로 이사. 이곳서 12년간 살았고 대표작 ‘제1과 제1장’ 집필. △1946~1947년 서울문리대와 연희대 문과대에서 소설론 강의. △1950년~1955년까지 해군 정훈장교-정훈실장-정훈감-국방부 정훈국장을 역임하고 대령으로 예비역 편입. 숙명여대 대학원 강사 취임. △1956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국제 펜 런던대회에 이헌구. 백철. 이하윤 등과 한국대표로 참가하고 2개월간 유럽여행. △1957년 단국대 국문과 교수 취임. △1960년 4월 21일 뇌일혈로 별세.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문총장’으로 장례식. 묘소는 도봉산자락 창동의 천주교묘지. 6월26일 구상 시인의 주선으로 묘비제막. 비명은 구상 시인, 글씨는 김충현 서예가, 묘비는 차근호 조각가의 작품. △1975년 ‘이무영대표작전집’(전5권)발간(신구문화사). △1985년 4월 20일, 25주기를 맞아 고향인 충북 음성군 음성읍 문화동에 이무영문학비 건립. △1990년 음성군은 이무영문학비를 설성공원으로 옮기고 이듬해 구상시인의 추모송비를 문학비 옆에 나란히 세우다. △1994년 동양일보가 발의한 ‘무영제’ 개최를 음성문화원이 주관하고 동양일보와 음성군이 후원키로 결정, 4월 21일 1회 ‘무영제’를 이무영문학비 앞에서 개최. 이듬해인 1995년, 설성공원 앞길을 ‘무영로’로 명명하고 2회 ‘무영제’식전 명명식을 거행. △1996년 4월 21일, 음성군과 음성문인협회가 이무영생가에 표지와 표석 설치. △1997년 6월 17일, 한국문인협회와 SBS문화재단 후원으로 생가터에 한국문학 표지 제막식 거행. △2000년, 40주기를 맞아 ‘이무영문학전집’(전6권)을 국학자료원에서 간행. 동양일보와 음성군은 40주기를 맞아 ‘무영문학상’을 제정하고 매년 4월 열리는 ‘무영제’에서 시상. 동양일보 출판국은 ‘이무영의 문학과 생애’를 출간, 매년 무영제 행사 참석자들에게 보급.

 역대 ‘무영문학상’ 수상자

 ▷1회(2000년)/이동희 ‘땅과 흙’ ▷2회/김주영 ‘아라리 난장’ ▷3회/김원일 ‘슬픈 시간의 기억’ ▷4회/이현수 ‘토란’ ▷5회(2005년)/한만수 ‘하루’ ▷6회/ 심윤경 ‘달의 제단’ ▷7회/ 조용호 ‘왈릴리 고양이 나무’ ▷8회/ 김영현 ‘낯선 사람들’ ▷9회/ 이동하 ‘우렁각시는 알까?’ ▷10회/ 김형경 ‘꽃피는 고래’ ▷11회(2010년)/전성태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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