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UPDATED. 2018-09-20 19:25 (목)
장 석 연 청주서원경교회 담임목사
장 석 연 청주서원경교회 담임목사
  • 동양일보
  • 승인 2010.10.25 20: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7명으로 개척한 교회 20년만에 1만3000명 성전으로

 

 

장석연 목사는…

△1943년 11월 24일 충북괴산군 불정면 목도리 출생 △목도초-목도중·고-청주대 국어국문학과(1968)-동 대학원-충남대 대학원(박사과정 수료) △장로회 대전신학대(1990)-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1995) △장로회신학대학교 박사원(목회학 박사. 2000) △청주대 국문학과 강사(1972)-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18년간)-사직(1989) △청주서원경교회 창립(1990년 10월8일)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청주서원경교회(청주시 흥덕구 가경동171·☏043-234-3835)담임 목사 △충청노회 회장(2010.10.18 ) △저서-‘새물결 전도훈련 교재’ ‘새교회운동성경공부 시리즈(4권)’ ‘새가족 교육교재’ ‘설교집’ 등. △가족-부인 김영애(61)장로, 장남 철웅(34·자영업) 자부 성경화(32·서원경어린이집 원감) 장녀 한나(32·사회복지사) 사위 김수진(34·데오스설계사무소 대표)

 

40대 중반… 대학 국문과 교수 18년 접고 목회자의 길로

20년간 5000회 설교, 준비에 남다른 열정 ‘명설교 목사’

지금부터 꼭 20년 전인 1990년 3월, 청주시 복대동 2008 삼일아파트 상가 3층 76평짜리 건물이 계약됐다. 매입자는 교회를 하겠다는 중년 부부였다.

그리고 5개월 뒤인 8월 1일 7세대 27명이 모여 성전입당기도회를 갖는다.

기도를 주관하는 깡마르고 뿔테 안경을 낀 보통 키의 남자-18년간 후진양성에 애정을 쏟던 청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홀연 목회자로 변신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서약하는 장석연(47)목사. 그의 첫 설교는 결연決然했다.

“이 자리는 서원경교회의 첫 번째 공식예배를 드리는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서원경 개척의 주역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또한 동일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이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감당할 결의를 주십니다. 우리들에게 새 출발 새 역사를 이루어 갈 새 힘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들에게 미지의 세계를 향한 외로운 발걸음에 동행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긍정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 큰 꿈을 품고 그 것을 날마다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 사랑하고, 순종하고, 충성하는 그릇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의 기도를 들으사, 상상마저 미치기 어려운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 그분이 바로 우리 ‘서원경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먼저 이 곳에 서원경교회의 터를 잡으셨고,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 분의 손을 잡고 나갑시다.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 목사는 목사가 되기 이전 국문학자로서 문화를 찬란히 꽃 피웠던 신라시대의 청주를 서원경西原京이라 했음을 상기 시키려는 뜻이 숨어 있었겠으나, 아무래도 교회 이름으로는 생경했던 ‘서원경교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관계된 극히 몇 사람을 빼고는 아무도 눈여겨보지도, 관심을 끌지도 못했던 이 작은 교회의 이 같은 미미한 태동이 20년 뒤 충북에서 가장 많은 교인과 영향력을 지닌 교회 중 하나로 성장하리라 예견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또 하나의 ‘신설 교회’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서원경교회는 처음부터 남달랐다.

첫 기도회가 있던 날 장 목사는 18년간의 교수 퇴직금과 그동안 예축됐던 모든 돈을 털어 장만했던 청주시 흥덕구 죽림동 32의 대지 279평을 교회부지로 헌납(당시 시가 2억원 정도)했고, 며칠 뒤엔 남·여 전도회와 교회학교가, 또 며칠 뒤엔 성가대가 결성됐으며 뒤이어 11개 구역으로 교회 구역이 편성됐다.

충청노회 가입으로 10월 8일 서원경교회 창립예배가 행해졌다. 이날의 신도 수는 100명이 넘어섰다. 2개월 전 27명으로 시작한 교회라고는 생각 못할 성장세를 보였다. 그리고 20년-. 교인의 수가 1만3000명을 넘어섰다.

장목사와의 ‘동양 초대석’ 대담을 위해 다시 찾은 18일 오후 1시의 서원경교회는 충청노회 200여개 교회의 목사와 장로 400여명이 모여 임원선출을 하고 있었다.

장 목사는 이날 2시간 뒤에 있을 본인의 충청노회 회장취임식 직전이어서 몸과 마음이 바빴을 터인데 불쑥 나타난 취재팀에게 잠시 시간을 할애했다. 오랜 세월을 사귀며 다급하게 일을 처리하는 기자의 생태를 익히 알고 있기에 특별한 배려를 했으리라.

-서원경교회가 지난 8일로 20년, 오늘은 충청노회장 취임을 하십니다. 어찌보면 겹경사를 맞는 셈인데 소회는 어떠신지요.

“일반적으로는 이해가 잘 안될것인데… 목회하는 사람에겐 하나님 계획이 계시고 사람 계획이 있어요. 그런데 늘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계획은 훨씬 크고 온전하신 계획입니다.”

-‘하나님 계획’이라는 것은 어떤 바람(염원)인가요?

“우리 신앙차원에서 보면 하나님 계획이 선재先在하는 것으로 봐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 대한 계획이 계셔서 결국 그 계획 앞에서 우리가 쓰임 받는 것이지요. 목회자는 소명召命 이예요.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일을 맡기고 부름을 받아 순종해서 일하는 것이지요. 그런 처지에서 봤을 때 우리가 명확히 알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선재를 알고, 부름을 받아서 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열심히는 했는데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자신이 없어요. 하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내가 갔는지 자신이 없어요. 그분이 원하시는 방향이 있고 그 방향에 우리가 맞춰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못한 듯싶어요.

-목회자 이전이면 몰라도 그 이후면 맞춰진 생활이 아닌가요?

“비행기가 자동항법장치에 의해 가지만 기후라거나 계기이상이거나… 결국은 사람이 항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조종간을 잡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20년을 돌아보면 인간적인 욕심이나 나 자신의 가치관 등이 섞여서 휘청거렸던 부분이 눈에 보여요. 20년 세월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이지만 돌아보면 그게 제일 아프게 눈에 보이네요. 하나님 계획에 대해 계획을 맞췄는가 지요. 또 하나는 우리 확신은 하느님 계획은 완전하고 좋은 것인데 우리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생각, 가치관, 능력 모두 부족하지요. 하나님 계획만큼 해드리지 못한 부분들, 방향이 좀 틀려진 것과 그 분량에 있어서 그분 원대로 못한 부분들이 많이 보여요. 그래서 원고지 고쳐 쓰는 것처럼 다시 할 수 있다면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지요. 다시 시작할 기회는 없는데, 앞으로 3년밖에(정년퇴임이) 안 남았으니까요. 만일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방향에 있어서는 열심을 다해 그분 뜻에 조금은 더 가까이 가서 뭐를 해 드릴 수 있었을 것인데 그거 못한 게 아쉬워요. 인생이 한번 살고 마는 것인데 어떻게 하겠어요.”

-대학 교수직에서 목회자로 전환할 때 갈등이 심했을 거라고 봐요. 실제 그런지, 가볍게 결단을 할 수 있었는지… 우리가 알기에는 한 젊은 교수의 자살사건이 충격을 주었을 것이라고들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만….

“한 과에 있던 젊은 교수가 결혼한 지 8개월 만에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어요. 6년간 연애를 한 후 결혼을 했대요. 죽기 전에 둘이서 학교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하는 말이 어려서는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에게 칭찬 받기 위해 산 것 같은데 결혼하고 나니 자기 기준은 없어지더래요. 죽은 후 서울 모 병원 영안실에서 시신을 혼자 지키다시피 했어요. 병원에서 보호자 대신 시신 확인을 하라하여 벗겨진 얼굴을 보았더니 그 표정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 일이 있은 후 충남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을 때 주임 교수였던 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지요. 이 두 사건을 겪으며 내가 진즉에 그 두 분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가 됐지요. 그러나 그 사건들이 나를 목회자로 만든 직접적인 계기는 아닙니다. 얘기하려면 좀 길어집니다”

-긴 사연을 축약해서라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골서(괴산목도)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국어를 가르치던 안영자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내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데다 국어는 곧잘 했지요. 그런데 그분이 전근을 가면서 나를 불러서 조용히 말씀을 하셨어요. 자기가 존경하는 분이 두 분인데, 한분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가르친 교수님이고, 또 한분은 어려서 자기를 키워줬던 목사님이래요. 그러더니 “너는 교회도 잘 다니고, 똑똑하니까 ‘교수’와 ‘목사’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그때 그 말씀을 들으면서 ‘선생님 제가 두 가지 다 하겠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수가 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서 목사도 되겠습니다.’ 이렇게 속으로 대답을 했어요. 이 같은 사연을 가슴 속에만 품고 있다가 언젠가 기독교텔레비전 방송에서 말 했어요. 아무튼 그런 게 살아오면서 안으로 밖으로 이제 삶의 지표처럼 된 것 같아요.”

-그 같은 마음의 맹세를 실현키 위한 내공의 세월이 길었군요. 그러니까 중2 때의 결심과 두 교수의 죽음이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요인들이 된 것은 확실한 것이겠군요.

“그 두 가지가 저한테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됐지요. 그런데 대학에 사표를 내야겠다고 말을 하면 번번이 집사람은 한사코 반대를 했지요. 그 후 89년도 여름방학 때였어요. 나는 사표를 내야겠다, 그리고 학사편입으로 대전신학대를 가겠다며 결심을 말했는데 아내는 또 반대를 하더군요. 속도 답답하고, 바람도 쐴 겸 둘이서 차를 타고 그냥 고향인 목도를 갔어요. 가는 중에 감물면을 지나서 ‘느티재’라고도 하고 목도에서는 ‘박달산’이라고 부르는 부근 길가에 차를 세웠어요. 차안이 답답해서 밖으로 나가니 집사람도 따라 내렸지요. 그런데 서쪽을 쳐다본 순간 느티재 위에 쌍무지개가 떴어요. 파란 하늘에 쌍무지개가 현란한 모습으로 떠 있는 것을 제 집사람도 한참을 보고 있더니 조용히 ‘신학교 가세요.’ 라고 하더군요. 참 극적이었어요. 무지개 보고 결정을 했어요.

-‘쌍무지개’가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노아 홍수 때에 홍수로 세상을 휩쓸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물로 세상을 다시는 심판 안한다고 그 언약으로 무지개를 준다고 했었어요. 집사람은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 약속을 확인하고 신학교 가라고 한 것이지요. 그렇게 하고 돌아와서 사표를 냈지요. 그때 제가 보직이 학과장하고 대학원 주임교수 하고 그랬는데 대학원장인 정용태 교수께서 많이 말리시더라고요. 나도 갈등을 많이 겪었지요. 그런데 수리가 안돼서 다음 학기는 10시간 전임강의를 다했지요. 힘들었어요. 심리적으로 힘든 것은 교수 하는 일이 아깝다는 것은 아니에요. 국어선생으로서의 자부심, 국문학에 대한 애정, 아이들에 대한 사랑, 공부하면서 정이 든 사랑하는 모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난다는 게 힘들더라고요.”

-현재의 자리로 교회를 옮기면서 중흥기를 맞았다면 말이 되는지요.

“서원경교회가 이 자리로 옮겨 온 것은 98년 6월입니다. 부지면적은 1000평에서 조금 빠진답니다. 우리는 정체기는 조금 있었는데 정체기란 교회가 초기에 발전하다 갈등기가 있어요. 갈등을 겪어서 일부 교회가 나가기도 하고 교회 기존 세력과 충돌도 있던 시기가 있고 정체가 됐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장이 쭉 됐지요. 거의 매년 배가倍加 된 셈이니까요. 주보에 보면 인원이 나오는데, 우리가 90년에 개척하고 나서 91년 92년 이럴 때 100명 200명 쭉 늘었어요. 그래가지고 두드러지게 성장한 것은 아무래도 여기 옮겨 와서지요. 한 1000여명 될 때 옮겨왔거든요. 교회 짓고 옮겨온 뒤 아파트단지들이 입주했잖아요. 그러면서 많이 성장이 됐지요. 우리 전도운동도 많이 했습니다.”

-목회자 하면 어쨌건 신도들이 와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해 듣는 것- 즉 소통시키는 것이 설교잖아요. 목사가 설교를 잘 하냐 못하냐는 차이는 결국 성경 연구인가요?

“연구는 지식일 것이지요. ‘성경’과 ‘성서’를 우리는 어떻게 쓰냐하면, 같은 것이긴 한데 우리 느낌은 ‘성서’라고 하는 것은 개혁성향이 강한 데서 쓰고, 장로교 통합교에서는 신앙적으로 접근 할 때는 ‘성경’이라고 하지요. ‘서’書보다는 ‘경’經이 더 좀 그렇지요. 중국에도 3경이 있지요. 성경이라고 쓰는데 성경에 대한 연구와 목사는 성도들과 더불어 영적으로 대화 하거든요. 영적인 대화는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잘 이해가 안돼요. 영성인데 성경에 대한 지식과 영성이지요. 한 가지 더 있다는 것은 전달이니까요. 전달은 언어에 대한 이해예요. 말을 어떻게 구사하느냐가 중요해요. 성경에 대한 지식과 영성, 그리고 전달력 이게 설교라고 봐요. 전달력은 어찌됐던 문학 하는 사람은 호소력 있는 표현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 교회 밖에 있는 우리가 듣기에 장석연목사의 설교가 와 닿는 게 많다고 평을 한다는데 지금 말씀 들으니 영성과 전달력이 잘 되면 그렇겠네요. 그런데 설교 준비가 복잡하지요?

“신학교에서 제가 학생들 가르칠 때도 얘기를 했는데요. 설교 준비가 논문 준비 같을 수는 없지만 학문적인 연구를 해 본 사람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방법은 취득할 수 있어요. 그래서 자료들을 가지고 설교를 얽어 짜는데 그것은 제가 학문을 좀 한 것이 큰 도움이예요. 학문적인 도움이 틀림없지요. 그것을 좀 가르치고 싶어요. 그것은 간단한 것인데 잘들 몰라요. 자료를 어떻게 뽑는지, 어찌 됐든 자료예요. 그것을 구성하고 구조를 만들고 하는 것은 설교하는 사람들이 조금 공부해야 될 분야 같은데 사실 그 교육이 잘 안돼요.”

-지금까지,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20년간 해 온 설교를 하는데 매번 달라야 하잖아요. 지금까지 한 설교가 몇 회쯤 되는지 몰라요?”

“모르지요. 20년인데, 한해에 설교를 300번 한다고 쳐도 한 5000번 했겠지요.”

-그러니까 20년간 5000번의 설교를 했는데 중복되거나 반복 된 것은 없습니까?

“같은 본문이, 성경이 선택 될 수 있어요. 같은 성경이 선택되고 설교의 뼈대는 같은데 거기 상황성이 있잖아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상황이라든지, 거기에 담아야 하는 정감적인 요소들이라든지 이런 것들이지요. 뼈대는 같아도 설계는 다르다는 것 이예요. 현장에서 표현되니 같은 설교는 있을 수 없어요.”

-대략 한 주일에 설교를 준비하는데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나 준비하는지요.

“새벽기도나 수요일 설교 같은 것은 좀 간단히 해요. 수요 설교는 성경에 있는 내용이 ‘이것이다’라고 초점을 맞춰요. 새벽기도도 마찬가지고요. 주일 낮 설교는 중요해요. 그것은 목요일부터 준비 하지요. 목요일에는 말씀, 어떤 말씀을 정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무엇을 말하는 주제가 있어요. 주제를 선정하고,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는 대개 목요일쯤 끝나야 되고 그것을 가지고 금요일하고 토요일 이틀을 말씀 준비를 하지요. 다른 일도 해가며 해야지요. 밤늦게 까지 해요. (이때 부인이 찻잔을 들고 오다 “새벽 3시 전에는 방에 안 들어 오세요” 라고 거둔다) 그런데 일이 임박해서 몸 달아야 되니까. 원고는 언제나 임박해서야 마무리가 됩니다..”

-대략 한 번 설교하는 시간은요? 일요일엔 몇 번이나 설교를 하는지요.

“우리는 좀 길게 해서 35분정도 해요. 일요일엔 여섯 차례의 예배가 있는데 새벽 예배 때의 설교는 한 달에 두 번쯤 하지만 낮 시간 때의 다섯 번 설교는 제가 다 하고 있습니다.”

-지치지 않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성스러운 소명감으로 합니다. 주일 예배를 열심히 하고, 이튿날인 월요일엔 심신을 쉬려 노력합니다. 대개의 경우엔 낚시를 즐깁니다. 부부가 그때그때 맞는 곳을 가서 낚시를 하면서 피로를 풀지요. 수 십 년간 해 온 취미여서인지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 노회장으로 취임하잖아요. 공식명칭은 어떻게 됩니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충청노회 노회장입니다.

-3년 뒤면 은퇴지요? 은퇴 후 무엇을 구상하고 있습니까?

“저는 선생 출신이어서 인지 교회 안에서 자라는 세대를 가르치는 문제, 교회 교육인데, 교회 교육 부분에서 해야 될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미국 가서 그런 것을 보고 왔는데 저는 법이 허용되는 한계 안에서 아이들 방과 후 교육을 하고 싶어요. 교회 안에 인적 자원 활용해서 봉사하면 되잖아요. 교회차로 아이들 데리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면서 키우는 게 교회와 사회, 미래를 위한 것이지요.”

- 좌우명 있으신가요?

“우리 집안은 ‘정직하자’예요. 저는요 오늘날 한국교회 문제는 뿌리가 정직하지 않은 것에 있다고 봐요. 예수 믿는 사람은 ‘말 한마디가 보증되는 것’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빛이 고르게 번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을 지면사정으로 다 다루지 못해 아쉽습니다.

 ▶글·대담/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기록/ 오상우 ▶사진/ 임동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충청대로 103 (율량동)
  • 대표전화 : 043)218-7117
  • 팩스 : 043)218-7447,7557
  • 창간 : 1991-12-29
  • 제보전화 : 043)218-722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원중
  • 명칭 : 동양일보
  • 제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 등록번호 : 충북 가 00003
  • 등록일 : 1991-12-27
  • 발행일 : 1991-12-27
  • 회장 : 조철호
  • 발행/인쇄인 : 유영선
  • 편집인 겸 편집국장 : 김영이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8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ynews@dy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