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웃으면 세상이 행복합니다. 그 신념 이루려 열심히 뛸 것입니다”

▲ 김병우 충청북도 교육감

 

‘아이들이 웃으면 세상이 행복합니다’

충청북도교육청 건물 이마에 걸려있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아름다운 서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가 내방객을 반긴다. 오렌지색깔과 초록색깔에 부드러운 서체로 만들어진 이 말이 낯설지 않은 건 왜일까. 지난 해 6.4지방선거-교육감 선거전에서 김병우 후보 캠프가 내걸어 톡톡히 재미를 본(?) 이 슬로건이 눈에 익어서일까. 이 문장이 품고 있는 깊은 의미 때문일까.

그렇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아이들은 세상의 표정이다. 그들이 웃고 있는 세상이면 모든 것이 O.K다. 세상이 어두우면 아이들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세상이 밝고 행복하면 아이들은 웃는다. 아이들이 웃는 세상, 아이들이 웃는 교육이 제대로 된 세상이고 제대로 된 교육일 것이다. 그 웃음이 바로 이 세상의 에너지고, 행복일 것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관에 들어서다 멈칫,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구호들이 발목을 잡는다. “급식비 지급 교육감이 해결하라” “밥 짓는 노동자에게 밥값지급은 기본” 등 붉은 글씨로 쓴 구호들이 왼편 현관을 메우고 있다. 지난해부터 불거진 급식종사원 1957명을 비롯한 학교 비정규직 5411명의 요구에 예산이 없는 충북도교육청은 속수무책일 뿐이지만, 아이들(학생들)의 밥을 해주는 사람들의 이같은 장기투쟁이 혹여 아이들의 웃는 표정을 빼앗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현관입구에 쓰여 있는 ‘아이들이 웃으면 세상이 행복합니다’라는 문안과 글씨가 참 좋더군요.

“선거 때 캐치프레이즈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깊은 의미를 미처 몰랐어요. 그런데 교육감 되고 나서 몇 달 후에야 ‘아 저게 답이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하겠다는 다섯 가지 교육감 상 중 ‘행복교육감’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아이들에게 행복해지라고 하려면 저부터 행복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몇 달 지나면서 자문자답을 해봤어요. 나는 행복할까? 그런데 취임 후 지금까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남들은 교육감이 교육계 내에서 재량도 많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니 행복해지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해야 할 일이 쏟아지는 자리예요. 그런데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적어요. 또 그 중 제가 정작 하고 싶은 일은 더 적어요.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교집합에서 과연 몇 개나 찾아지겠습니까. 해도 잘했다고 생각하고 뿌듯한 일이 별로 없는 거예요. 교육감 직 자체는 행복해지기 어려운 자리인 거죠. 그런데 저걸 보니 저게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선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든 후에 아이들 모습을 보고 교육감은 덩달아 행복해지는 수밖에 없겠다는 거죠.”

-해야 할 일은 쏟아지는데 그 중에 할 수 있는 일은 적고, 정작 하고 싶은 일은 더 적어진다면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제가 도민들로부터 기대와 허락을 받은 일, 그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을 넓혀야겠죠. 법적 재량의 범위를 넓히긴 어려울 것이고 제 능력을 키워서 할 수 있는 일의 폭을 넓히는 수밖에 없겠죠. 해야 할 일 속에 제가 정말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을 넓혀 가야겠지요.”

-취임 8개월이 돼 가는데 아까 한 마디로 말씀하셨지만, 하루도 행복한 날 없이 지나 오셨다니 짚이는 것들이 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감되기 전의 일상과 이후의 일상은 많이 달라졌지요?

“가장 큰 차이는 일과 활동이 거의 공식적인 일과에 매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아무래도 모든 것이 사적인 영역이었다면 지금은 공적인 영역이 돼 버렸습니다. 일과도 제가 중심이 되어 짜기 보다는 교육감에게 주어지는 책무 중심의, 비서실에서 짜주는 일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아침 일과는 공식적으로 출근하며 시작되는데, 출근을 너무 일찍 해도 안 되고 늦게 해도 안 되고, 오전 8시 30분 정도 출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 시간에 맞췄습니다. 출근 준비하는데 한 시간을 잡고, 7시 30분쯤 일어납니다. 조금 일찍 일어나 산책도 하면 좋은데, 제가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올빼미형입니다. 잠을 거의 1시나 돼서 잡니다. 그래서 만성피로가 문제입니다. 적절히 운동할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한데 그걸 못 가지니 제일 아쉽습니다.”

-출근 한 시간 전에는 무엇을 하는지요.

“스트레칭 5분하고 명상을 15분쯤 합니다. 아침 식사는 아내가 꼭 먹고 가라고 해서 15분 정도 먹어요. 가정식을 좋아해서 밑반찬하고 찌개하고 먹습니다.

주어지는 일정 속에 피동적으로 해내느라 허둥지둥하는 상태지요. 몇 달이 지나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서실에서 짜주는 대로 공식일정을 소화하는데 급급했는데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폭주해요. 저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서 저보다 더 잘 아는 문제는 실무부서에 위임을 하고, 정말 제가 가닥을 잡아야 할 일은 제가 하겠다고 했는데 그래도 하루에 10~15개씩 잡히다 보니 좀 가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정말 간곡한 순서로 잡으라고 했죠. 그런데 다들 간곡하다고 해서 이것도 안 되겠는 겁니다. 그러던 끝에 가닥을 잡은 것이 우선 밖에서 오는 면담 신청에 피동적으로 부응하다보면 제 중심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제는 제가 정말 필요한 접견이나 면담을 중심에 두려고 합니다. 충북교육을 위해 필요한 소통에 중심을 두고 만나야겠다는 거죠. 교육가족, 오피니언리더들과 먼저 소통을 하고, 남는 시간에 교육감에 호소하고 싶은 분들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최근 도내 고등학교 교장선생님들과 권역별로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그 자리도 제가 사회 보는 형태였어요.”

-시·군을 다니시면서 했나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 교육감과 현안을 가지고 소통을 한 적이 없었다는 반응들이었어요. 이제는 초·중학교 교장선생님들, 교감선생님들, 평교사들, 학부모들, 지역사회 인사들 이렇게 넓히려고 해요.”

-가슴 속에 있던 이야기들이 나오던가요.

“많이 나옵니다. 학교 선생님들의 고충을 알게 됐고요. 교장 선생님들끼리도 깊이 있는 얘기는 안 해 보셨다가 서로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된 것이 있어요.

우리 교육이 전부 대학 입시에 맞춰 있지요. 그 흐름이 15년 전부터 거대하게 바뀌어오고 있는데 일반고, 특히 명문고 교장일수록 대응이 늦어요. 제천, 충주, 청주시내에 있는 일종의 명문고들 일수록 정시 프레임에 갇혀 있어요. 서울대만 해도 2016년도에 80%를 수시로 뽑고, 일부 학과는 거의 100%를 수시로 뽑아요. 그래도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명문고들은 수시 비율이 50%도 안 됩니다. 특히 제천, 충주의 여학교일수록 40%밖에 안돼요. 나머지가 정시와 수능에 매여 있어요. 이게 큰 착각이지요. 명문고들은 대들보 감 다 모아 놓고는 서까래 만든 거예요. 지방의 고등학교가 서울의 고등학교와 대결하려고 하다보니까 학생들한테도 피해가 가는 거예요. 그런데 몇몇 교장선생님들은 그걸 느끼더라고요. 주변 일반고 진학 비결을 듣다보니 더 절감하는 겁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들이 알아도 학교 선생님들이 틀에 박혀 있어요. 그 중 깨우친 선생님들도 학부모들이 버티고 있으니 어쩌지 못해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충주, 제천 학부모들의 인식도 서서히 바뀌고 있어요. 사회적인 흐름이 바뀌는 것을 학교 밖에서는 조금씩 깨달아가는 거예요. 지역에서 여론 꽤나 형성하던 분들은 거기 명문고 나온 분들이잖아요. 내 자식은 내 후배 만들어야 한다는 데 사로잡혀 있는 거죠. 그런데 거기 갔다가 대학 입시에 불리해지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고 다른 데로 결단을 내려 보내는 분들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서 여기도 평준화해야겠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거죠. 이제는 명문고 교장선생님들도 입학전형방식의 변화에 따라 충북 전체의 교육성과를 높이려면 아이들을 고루 분산해서 기회를 많이 갖게 해야 충북교육의 총 역량을 높이는 길이겠다고 하십니다. 제가 간담회 자리를 안 갖고 이것을 역설했더라면 설득력이 적었을 것 아닙니까. 도내 고등학교 교장선생님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런 문제를 많이 발견하게 됐고. 서로 간에 공유하게 됐어요. 교장선생님들도 교육감이 생각하는 비전이나 교육적 고민을 공감하게 되고 이런 방식의 의미에 대해서도 공감하게 됐다고 하십니다. 저는 우리 교육 가족들의 자발성을 어떻게 잘 일구어 내느냐 하는 것이 교육계에 필요한 리더십이라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카리스마나 리더십보다 더 많은 우리 교육 가족의 지혜를 일궈내는 분위기가 중요한 거죠.”

-그러면 중학교, 초등학교 그룹으로 가면 또 새롭거나 생산적인 의견들이 나오겠군요.

“특성화 고등학교도 제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예전과 달리 학교 간판으로 사회적 지위가 정해지거나 직업 차별이 생기는 것이 없듯, 기술 전문성 우대의 기류가 생겨나고 있어요. 그래서 특성화 고등학교도 찾아가려는 흐름이 있다는 거죠. 문제는 특성화고가 한때 황폐해져 있는 사이에 그 전공성을 갖고 있는 관리자가 양성이 안됐다는 겁니다.”

-일선 학교에서도 우려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전공한 교장선생님을 모시는 것이 실업 교육을 진작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이미 지난번 인사를 앞두고 일선 학교서 그런 문제가 많이 제기돼 보은 자영고 교장선생님에 농업을 전공한 평교사를 임명했죠. 그런데 일부 언론에서 평교사 출신 교육감이 나오더니 파격 코드 인사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데 그게 아닌 거죠. 농고, 상고에 농업, 상업을 전공한 관리자가 없어서 체육, 음악, 역사를 전공한 선생님이 가면 관리만 하지 비전을 못 만들어요. 보은 자영고에서는 교장선생님이 1년 가 있는 동안 그것을 절감한 거예요. 비전공자가 와서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고 해서 과감하게 공모제 신청을 한 거예요. 그런데 공모제 신청을 하면 다른 교장선생님들에게 눈총 받습니다. 그래도 이 분은 사명감을 가지고 결단을 내려 공모신청을 하고, 신청자를 받았는데 그 중에 평교사가 제일 나았던 거죠. 실험이기는 하지만 분명 이 중에서 쇠퇴해있는 농업교육의 비전을 비전공자보다는 성과있게 일궈내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특성화고등학교에 공업을 맡는 교사가 왔는데 담당과목을 6개월 강습을 받고 왔다나 봐요. 그 교사 밑에서 배운 학생들을 어느 기업에서 어떻게 채용하겠어요.

“종래의 실업 교육이 공업계열은 예전에 기계 등을 전공한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상업고는 주산, 부기 등을 공부한 분들이었죠. 그 분들의 전문성을 심화시킬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직무연수나 자격연수를 제 때 시켜야 하는데 개별연수로는 안 돼요. 소집 단위가 형성이 돼야 해요. 전국적으로 타 시도 교육청과 같이 하는데 그러다 보니 늦습니다. 전문성 접근이 어렵고 결국은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고 교단의 신뢰가 깨지게 되죠”

-교육정책이 대학입시에만 치중하다보니 생기는 일은 아닌가요?

“기술인력을 당장 산업현장에서 그대로 쓰기는 어렵습니다. 벌써 10년 전에 이미 있던 말입니다. 공대 입학생이 3학년이 되면 1학년 때 배운 것은 구닥다리가 된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래서 학교에서는 당장 산업현장에서 쓸 직업 훈련을 하기는 어렵고 기초를 가르친 후에 현장에서는 어차피 재교육해서 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번 간담회에서 일부 특성화고 교장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특성화고에도 차라리 인문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반 인문소양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요. 당신들이 전공자로서 뼈저리게 절감하신 거죠.”

 

▲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이 김병우 충청북도 교육감과 대담하고 있다.

-교육이 낮은 것을 높이고 높은 것을 더 높이는 작업이지요. 말은 쉬운 말이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함축돼 있지요. 김 교육감께서 쓰신 책을 최근에 다시 읽었어요. 그걸 보면서 교육에 관한 많은 고민을 했구나 하는 것을 다시 느꼈어요. 교육감이 되기 전 교육관과 되고 난 뒤 교육관의 차이가 있지 않나요

“많은 분들이 저의 성향이나 정체성에 대해 당신은 뿌리가 진보 아니냐, 선거시기에는 정치적으로 변신을 하려 한 것 아니냐 하시는데,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제 기본적인 교육철학입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그런 교육관을 가진 후에 30대 초반부터 이른바 진보교육 운동에 들어섰어요. 진보적 교육만이 정답이라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교육성향이 너무 보수로 치우쳤기 때문이에요. 우리 교육계의 목표가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자’는 본질적인 목표가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을 기르자’는 실용적인 목표가 있지요.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자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진보적 교육관이고, 쓸모 있는 사람을 기르자는 게 보수적 교육관입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이후로 쓸모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에 치중해 오다보니 성적 우수한 모범생은 많이 길러졌는데 사람 됨됨이 교육은 안 돼 있어요. 그래서 참교육 운동에 뛰어든 거예요. 사람다운 사람 기르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요. 저는 한 번도 인성교육만 중요하다고 한 적이 없어요. 제 교육관은 두 가지 다 어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선거 때 두 가지를 다 소중히 하겠다고 하니 계산된 선거용 발언이라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저는 그전이나 교육감 되고 난 후에나 바뀐 것이 없어요. 30년 전부터 주장을 해왔고요. 교육관이 바뀐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전에는 한쪽의 주장만 해도 되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다른 편에 서 있는 사람을 아울러야만 한다는 고민이 생겼어요. 그전에는 보수적 교육관을 가진 사람 챙길 이유가 없었거든요. 그 분들은 이미 모든 자리 다 차지하고 있어요. 배재만 안 시키면 돼요. 이분들이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가 오니 뭔가 잃는 듯한 위기의식을 느끼더라고요. 저는 다 아울러야 두 가지 교육관이 가진 긍정 에너지로 전체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이쯤에서는 교육계에서는 우려했던 것 보다는 안도가 간다는 반응인가요, 아니면 반대인가요. 전체적인 반응은 어떤지요.

“기대와 우려는 예나 지금이나 저에게 다 들립니다. 그런데 선거 때나 지금이나 제 무기는 진정성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진 것을 얼마만큼 지극하게 보여드려서 공감을 얻어 가느냐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성이라고 하는 것은, 보수나 진보나 다 끌어안고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면 되는 것이란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은 뾰족한 사람들일수록 자기만 옳다고 하는 습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일수록 저를 선명하게 평가합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우려합니다. 자기 입맛에 안 맞으니까요. 그런 극단적 경우들은 제가 많이 염두에 안 둬도 될 것 같습니다. 극단적 입장은 제쳐놓고 그야말로 무난한 선에서 다 아울러야하기 때문이죠. 제가 분명히 했습니다. 다 아우르겠지만 극단적 입장은 아우를 수 없다고요. 합리적 보수, 합리적 진보 서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아울러야겠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다보니 확 바꾼다든가 하는 것은 제 방식에도 맞지 않아요.”

-밖에서 들 하는 말을 묶어보니 취임 4~5개월쯤 되면서는 퍽 안도가 된다고 하는 쪽이 대부분이었어요. 그것은 다시 말하면 수장의 품성과 관련이 있는 거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책임자라면 한쪽으로 쏠릴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지금 초등학교, 대학 나온 젊은이들이 4대 국경일 노래를 몰라요. 이 친구들이 졸업한 학교 교가도 모르고, 교장선생님 이름도 몰라요. 대학 때 누가 총장이었는지, 자기가 사는 지역 시장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이런 까닭을 현직 교장선생님께 물어보니 교사에 따라 가르치는 교사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강제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 기초적인 교육에 둔감하거나 외면하는 교사가 있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지 않습니까. 교육감으로서 국민이 갖춰야 하는 소양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해주신다면 좋겠네요.

“선생님들 마다 교육 프로그램 선택에 있어 다를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국민의례나 국경일에 대한 교육을 노래나 의례 절차를 강제로라도 시키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 다른 프로그램 해야 한다는 차이인 것 같아요. 제 입장은 그렇습니다. 어제(24일) 신규교사에게 임용장을 주는 자리에 제가 제일 우렁차게 애국가를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교육감 되고 나서 애창곡이 바뀌었다. 애국가가 애창곡이 됐다고요. 교육감이 돼 갑자기 애국자가 된 것이 아니라 교육감 되고 난 후에 하루에도 몇 번씩 애국가를 부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다보니 진짜 나라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대부분 애국가를 부르는 의례식장에서 다들 원키로 못 부릅니다. 애국가가 사실 교향곡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키가 높아요. 그런데 교육감이 애국가를 장송곡처럼 부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렁차게 불러요. 애국가가 행진곡풍은 아니지만 힘차게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내기 선생님들에게 얘기를 했어요. 선생님들 학교 현장에 나가시기 전에 이런 에피소드라도 기억을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노래를 불러서 애국심이 길러지는 것은 아니지만요, 어제도 도내 기관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더니 37사단장이 신병들 가족이 오는 자리에서 4절까지 부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분 말씀이 모든 장병들이 애국심을 절절하게 새기며 부르진 않아도 그 중 한명이라도 뭉클한 느낌을 갖는 사람이 있으면 되지 않냐고 하십니다. 또 이런 얘기도 나왔어요. 교육계에서는 “일절을 부르겠습니다”라고 얘기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일절만 부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아무리 약식이라고는 하지만 왜 ‘일절만’이라고 합니까. ‘일절을’이라고 목적지향적으로 얘기해야지요.”

노래는 멜로디도 있고 가사도 있는 건데 요즘 사람들은 멜로디만 있는 줄 알아요. 유치원생들도 성인들이 부르는 낯 뜨거운 노래를 부른단 말이에요. 사실 저는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가사를 꼭 봅니다. 국어선생 출신이라 그런지, 어법이나 표현 하나도 나중에 혼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교육적 배려를 해야 한다고 보는 거죠. 국어시간에도 유행가 가사가 얼마나 유치하고 치졸한지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분석도 해보고 했어요. 국경일노래에 담겨 있는 혼은 음악 아니라 국어 시간에라도 살펴봐야 합니다. 국경일노래는 가사도 되새겨 봐야하고, 멜로디에 담아서 몸에 익히게 해야 하는 거예요.”

-교육감님의 책을 보면 학원 문학상에 응모를 해도 잘 안되니 작가를 포기했다고 하셨더군요. 농사꾼을 원하는 아버님 뜻을 거역하고 교사가 됐는데, 교사가 됐을 때 꿈은 뭐였나요.

“교사가 되고서도 문학의 꿈은 못 버렸어요. 교사는 생업이고 글쟁이가 되고 싶다는 꿈은 포기를 못해서 신춘문예도 계속 도전했어요. 그러다 선생 제대로 되기도 어렵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때만 해도 교육에 대한 고민은 안했어요. 내가 열심히만 하면 인정받고 실력 있는 교사가 되는 것은 자신 있었거든요. 군 제대 후에는 군에서 익힌 ‘아이들 두드려 잡는 교육’도 그게 좋은 선생님 되는 길이라 생각하고 많이 했었어요. 그러다 80년대 중반 교육 민주화 흐름을 보게 된 거에요. 정말 좋은 선생님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인가 하는 것을 다시 가다듬게 됐어요. 주변에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하는 분들을 보니 저것도 쉽지 않고 저것도 참 아름다운 일이다, 내 자신을 던져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교육운동을 같이 하면서 교육 현실 제도 구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교육위원이 되니 교육감 생각도 나신건가요.

“벼슬자리라 생각해서 된 것은 아니었고요. 해직된 후 복직하고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어요. 여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중앙정부 정책이 만들어주면 좋지만 안 되면 자꾸 요구해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교육 자치를 이뤄냈는데 공간 속에서 의회나 집행청이 거의 주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육 자치의 주체가 유권자이기는 하지만 이분들은 선거 시기에 선택만 할 뿐 더 이상 참여 공간이 없어요. 주체는 의회와 집행청이에요. 평소에는 한계가 있어 저기에 진출해 들어가자는 생각을 했죠. 그래야 우리 뜻을 효과적으로 반영하겠더라고요. 이것도 여전히 교육운동의 연장입니다. 제가 생각했던 교육비전의 대안, 실현의 길 하나라고 볼 수 있죠. 교육위원이 되고서는 아래 위를 교육 현장과 집행청과의 중간에서 양쪽을 다 보게 될 수 있었어요. 주변에서도 굉장히 두려워했어요. 일종의 테러리스트라고요. 처음에는 경계심이 많았어요.”

-제일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교육위원이었다는 평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9월 1일자로 취임했는데 9월 18일인가 행정사무감사가 시작됐어요. 제가 처음 한 얘기가 막상 교육위원에 들어와 가까이 와 보니 인식이 달라진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육감님의 리더십이 생각보다 권위적이지 않구나 하는 것도 느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부단위에서도 적극성과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어 미더워 보였고요. 그러자 집행청에서 저 사람 입에서 저런 소리 나올 줄이야 하는 반응이었죠. 저는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짚을 부분은 짚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비판해도 칭찬해도 다 점수를 땄어요. 저한테는 좋은 경험이었고, 편견을 많이 씻어내는 과정이었어요.”

-교육감에 대한 꿈을 가진 것은 자의 반, 타의반이었는지요.

“주도권을 가진 곳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야 할 곳이라는 생각은 했었어요.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고, 교육위원을 4년 하고 난 후에는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준비 정도가 부족하니 다른 사람이 교육감에 나서야 했어요. 지금 현재 거론되는 사람보다는 혁신적인 마인드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많이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6.2선거를 앞두고 1년 전부터 사람을 찾았고, 그러다 도종환 선생에게 가서 제발 좀 나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당시 도종환 선생이 작가회의 사무총장을 하고 있었는데 집무실에 가서 열흘 간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도종환 선생이 당신의 영역은 문학이지 정치판에 못 들어간다고 워낙 완강하게 고사를 했고, 문단 원로들도 허락을 안 했어요. 2009년 해를 그렇게 넘기고 낙담하고 와서 1월 내내 집에 앉아 삼국지만 봤습니다. 그러다 2010년 2월 20일 넘어서 제가 나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6월이 선거였는데. 이미 2월 2일 부터 예비후보등록을 했던 때예요. 3월 내내 돌아다니며 시민단체에 허락을 얻었고, 4월 2일 예비후보등록을 했어요. 딱 두 달 준비했는데 그래도 나와 줘서 고맙다는 사람 많아서 39.19%를 얻었어요. 그때만 해도 누군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선거를 앞두고 다른 가닥을 잡았던 이기용 전 교육감과는 교감이 있었는지요.

“저는 교육위원 시절에도 다른 교육위원님들과 함께 직언도 했지만 아주 공식적인 직언 말고 사적으로도 직언을 드리기도 했어요. 2010년도에 제가 결심 하고 제일 먼저 찾아가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됐다고 얘기했어요. 전임 교육감은 저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겠죠. 상당히 위협적인 주자로 선거를 치렀고, 그 이후에 이 교육감과 척질 일은 없었기 때문에 제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었죠. 주변에서 이 교육감 후임으로는 아무래도 이 교육감과 철학이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해서 주변에서 저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죠. 사실 이 교육감님은 제 처가 쪽과 인연이 있습니다. 이 교육감님이 사석에서는 저희 처가 덕분에 교육감하게 됐다고 얘기할 정도였어요.”

-교육감이 된 뒤에 두 분이 만났는지요.

“그럼요. 당선자 시절에 전임 교육감님들께 다 가서 인사드렸습니다. 김영세 교육감님은 제가 두 달간 농성까지 했고, 배척하는데 당사자이기도 해 찾아뵈려는데 굉장히 편찮으셔서 전화만 드렸어요. 그랬더니 ‘잘하실 줄 압니다. 잘하십시오’ 하시더라고요. 돌아가셨을 때도 조문 드렸고요. 김천호 교육감님 사모님을 찾아뵙기도 했지요. 사모님께서 ‘되실 줄 알았다’고, ‘교육감님 생전에도 당선자님을 좋게 평가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기용 교육감님도 댁으로 가서 직접 만나 뵈었고. 많이 이끌어 주십사 말씀드렸고요. 저하고 이 교육감님하고 그렇게 거리 두거나 척질 이유는 아무 것도 없는 관계죠. 정인영 교육감님은 경기도 요양원에 계셔서 못 가 뵈었어요. 유성종 교육감님은 이번 선거 전에도 가서 도전해보려 한다고 말씀 드렸었고, 선거 본부에 모시려고까지 했어요. 세배도 갔었어요.”

-유성종 전 교육감께선 뭐라고 덕담하시던 가요.

“격려해주시고 주변에 걱정하는 분들의 걱정을 얼마나 씻을 수 있을지 유념해 달라고요. 당선하고서는 취임식에 오셔서 축사까지 해주셨어요. 정말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주신 당부가 있었어요. 첫 번째 김병우 후보를 지지한 사람에게 이제 교육감을 놔줘라. 두 번째 반대하고 우려하시는 분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시간을 주고 기다려줘라. 세 번째 저에게 두루 아울러서 충북교육에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을 수 있게 해달라고. 그때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납니다.”

-지금 이렇게 보면 김병우 교육감이라는 사람이 뿔이 나거나 꼬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확인된 시점인데 그렇다면 교육에 일념 하셔야 하는데 그동안 검찰에 발목 잡혀서 힘들었잖아요. 아까 말씀처럼 송사가 큰 가닥은 잡혔지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요?

“참 곤혹스러웠던 것은 이것이 교육가족들과 아이들에게 다 보였다는 것이지요. 수사 대상에 올랐다는 것, 법정에 드나드는 것만으로 너는 죄인이라는 시각을 받고 있는 거죠. 교육계 수장으로서 자괴감이 엄습했죠. 더군다나 제가 한 일이 가슴에 손을 얹고 봐도 직을 잃을 정도로 그렇게 잘못한 것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런데 법질서는 엄격한 것이라, 특히 교육계 수장은 작은 잘못도 크게 단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출직 공직자에게는 생사가 걸려 있는 일이라 정말 아찔한 것이죠. 벌금 100만원 정도야 운전 부주의로도 낼 수 있지만, 선거법 벌금은 재앙입니다. 직만 잃을 뿐 아니라 그동안 선거 경비를 다 환원시켜야 해요. 국고에 손실을 끼친 사람이라고요. 그런데다가 도민들은 얼마나 큰 심려가 됩니까. 벼랑 끝에서 기도하는 심정 될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법리도 잘 모르지만 변호사님이 일단은 법리는 전문가에 맡기고, 진정을 다해 재판부, 도민의 마음을 사라고 해서 그렇게 했죠. 제가 살아오는 동안 내내 무기가 진정성밖에 없었거든요. 선거 시기에도 그런 마음을 사서 인정받고자 했는데 그 중에 어떤 행태가 죄가 돼서, 프로포즈했다가 죄인으로 몰리는 심정이 됐거든요. 제 진정성을 보이려고 한 것이 실체적 진실을 가리는 근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법리적으로 시비나 논란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는 몰라요. 앞으로도 법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문가에 맡기고, 저는 진정성을 갖고 그 자리에서도 충북교육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거죠. 재판 과정에서 저는 저 나름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 다음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선거 과정에서도, 재판 과정에서도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작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절대자의 주관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움이 있으면 여지없이 며칠 안에 그것을 채워주는 귀인이 나타났어요. 심지어 기사 한줄 조차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이사이 걱정해주시는 모든 분들이 오늘의 귀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제 노력으로 한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보살핌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도하는 자세가 됐어요. 남아있는 과정도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하니 더 의연해질수가 있었어요. 이번 일을 오래 겪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검찰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하게 됐어요. 저는 괴롭지만, 그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은 어찌 보면 고고할 정도였어요”

-재판 받는 과정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무엇이었나요.

“많은 분들이 이것을 김병우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자기 문제라고 생각해준 것이 감동이었죠. 저희 식구 제자인데, 그 제자의 초등학교 3~4학년 되는 아이가 무죄를 받았다는 제 뉴스를 보고 자기 엄마에게 달려가 전하며 그렇게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살아오시는 중에 잊혀지지 않는 많은 감동이 있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잊을 수 없는 감동은 뭘까요.

“치열하게 살면서 어떤 자기 믿음을 향해 자기를 던지는 모습을 봤을 때 뭉클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해직돼 있을 때 똑같은 심정으로 해직돼 있는 사람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을 때. 그런 ‘거리의 교사’들이 매년 새 학년 초가 되면 갈 데가 없어 우리를 학교로 돌려보내 달라고 청와대로 돌진을 합니다. 1500명이 청와대로 몰려갑니다.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150~200m 가다보면 경찰이 와서 가로막습니다. 남성여성 다 팔을 끼고 누워 있고 사방으로는 경찰이 다 차 있죠. 몇 시간이 지나 버스에 우리들을 싣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저녁 때쯤 난지도, 화장장 이런데 풀어 놓습니다. 너희들은 시체만도,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이라며 갖다 버리는 거죠. 그러면 여선생님들이 버스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버스에 매달립니다. 우리를 깔고 가라고요. 저는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못합니다. 그런 모습. 자기 믿는 것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저렇게 못하는데 하는 부끄러움과 감동이 느껴집니다.”

-어머님은 어디에 누구와 계세요.

“혼자 계십니다. 상주 고향집에. 우리 나이로 86세신데 아주 정정하십니다.”

-어떤 아들이십니까?

“그동안 저를 부족함 없이 키웠다고 어머니 당신은 자부하시는데, 왜 사람 구실을 못하는지 속상해 하셨어요. 주변에 자식들 자랑하는 사람이 많은데 자식 자랑 할 것이 없다고요. 매일 문제 교사로 나와서, 전교조 ㅈ자만 나와도 질색하십니다. 그러다 교육감이 되니 주변에서 참 장하다 그런다고. 그런데 교육감 되고도 맨날 재판 받으러 다닌다고 속이 많이 상해 있으시지요. 고향 분들은 고향도 아닌 객지에 가서 인정 받은 것이 장하다고들 하십니다만, 저는 저를 품어 준 충북도민들이 장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시절 때보다 교육감이 되고 보니까 교육행정이 굉장히 어렵지 않아요? ‘교육’이 밑에서 볼 때와 위에서 볼 때가 다르지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교육감이 행복해지기 어려운 자리인 게, 사방에서 요구는 많고 다 들어 줄 수는 없으니 가시방석입니다. 만인이 쳐다보고 있으니 가뜩이나 발가벗겨지는 자리인데, 또 그만큼 어려운 자리인데 저는 진정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임하는 수밖에 없어요.”

-교육감의 꿈을 키우고 이루셨는데 교육감 되고 나니 또 다른 꿈이 생기지는 않던가요.

“저는 교육감으로 멋진 퇴임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말년이 안 좋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개인적인 불운이 아니고 충북교육계의 불행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임 중에는 사랑을 받고, 퇴임 후에 존경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 이후에 후임들도 그 자리는 해볼 만한 자리라고 생각할 것 아니에요. 그게 남아있는 제 바람이에요.”

-나이를 보거나 이런 저런 것을 따져도 더 연임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실 텐데요.

“두 번의 재판, 선고로 하면 세 번이죠. 그 과정을 겪는 동안 이미 몇 개월 사이에 세 번은 연임한 기분이에요. 당선할 때와 똑같은 기분이고, 축하 메시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3선급’ 기쁨을 누린 거죠.”

-최소한 재선은 꿈꾸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래야 목표한 것도 이루실 것이고…

“그것을 염두에 두지는 않아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다들 젖어들듯 해야 한다고 하세요. 숨고르기를 하고 ‘1~2년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 ‘차근차근 해라’하고 얘기를 하고 있으니 4년 갖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다만 충북교육을 탄탄하고 차근차근 해야겠다는 차원에서 시점을 겨냥한다거나 그럴 뿐이지 2선, 3선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는 여러 도움도 필요하지만 변수는 의외로 더 많이 생길 수 있어요. 이후 선거 제도가 어떻게 되는지, 교육 자치 제도가 어떻게 되는지도 중요하고요. 그것은 제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저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주어지는 기회를 따를 거예요.”

-지난 선거에서 도와준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은혜를 갚아 나갈 것인지요.

“캠프도 500여명에 이르고, 시민단체 뿐만 아니라 도지사후보였던 분의 조직들도 합류를 했어요. 연합군이었어요. 구체적으로 금전적인 신세를 진 분은 없어요. 전부 다 몸과 마음으로 대가없이 했거든요. 실제로 자원봉사나 다름없이 하셨거든요. 기본적으로 선거비용으로 처리할 부분만 했지요. 돈이 없어서도 못 줬지만 만약에 줬더라면 그것, 폭탄 이잖습니까. 없길 다행이었고, 안 준 게 다행이었어요. 그분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지요. 조건없이 했겠습니까. 교육감이 갖고 있는 것이 재정권이나 인사권인데, 인사권은 취업청탁 같은 것을 더러 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비정규직도 공채가 아니면 어렵습니다. 서운한 것은 차차로 풀 수 있는 방법은 찾아보더라도 위험한 것은 안고 갈 수 없어요. 재판 트라우마가 약이 되는 거예요. 사람을 천거해주는 것은 좋은데 청탁과는 구분이 돼야 합니다. 동냥하듯이 주는 청탁은 안 됩니다. 압력 아니라 협박을 받아도 못합니다. 충북교육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흙속에 묻혀있는 진주를 천거하면 가마라도 보내 모셔오겠지만 인사부분에 선거유공, 논공행상은 없습니다. 내신서를 똑같이 내야 합니다. 시시콜콜한 내신을 다 받으면 인사 재량의 폭이 좁아집니다. 내신 받을 때 30가지를 써내라고 했다면 31~2가지 거기에 써낼 수 없는 사정을 가진 사람, 이거는 어쩔 수 없이 천거를 통해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적재적소에 갖다 놓기 힘듭니다. 퍼즐 맞추기입니다. 인사권을 신세 갚는데 쓰거나 유공자에 대한 반대급부로 두거나 하는 것은 일절 없습니다. 제일 크게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서 제 분신처럼 평가를 받게 될 텐데 그 사람이 나의 분신으로 좋은 평을 받을 것인가가 중요하지요.”

-마지막으로 교육가족과 도민들에게 한 말씀 하시지요.

“교육의 성과는 가시적으로 하루 이틀 내에 거둘 수 없는 것이기에 그냥 믿고 따뜻하게 지켜봐주시면 차근차근 좋은 결과로 보답 드리겠습니다.”

-오랜시간 감사합니다. 제발, 아이들이 웃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담·글/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기록/지영수·조아라 ▶사진/김수연

 

 김병우金炳佑 교육감은…

△1957년8월4일 경북상주시 공검면 지평1길56-4에서 출생(58세) △김천중(1973)-김천고(1976)-충북대 국어교육과(1980)-충북대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1989) △1986∼2006년 회인중-목도중-증평여중-매포중-옥천중-주성중-청주남중 교사 △1989년 9월 전교조결성 관련 해직, 1994년 3월 해직교사 특채로 복직 △2000년 7월∼2001년 12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북지부장 △2006년 청주시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본부 대표 △2006년∼2010년 충북도교육위원회교육위원 △2010년 충북도교육감선거 출마 △2014년 6월4일 충북도교육감 당선 △가훈: 진광불휘(眞光不輝) △좌우명: 일기일회(一期一會) △가족-부인 김영애(56·내수 수성초분교 구성초 분교장)씨와 장녀 은지(32·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전문사 수료), 장남 용정(29·서울대법대 졸. 군복무 중)씨. △☏(043)29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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