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9월 동경유학... 궁핍한 생활에 좌절을 느끼고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3.1운동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른 포석은 생각했다. 수감돼 있던 내내 머릿속을 떠돌던 말이었다.

‘힘, 힘을 키워야 한다. 저렇듯 무자비한 탄압으로 조선의 백성들을 도륙내는 일제에 맞서려면 무엇보다 힘을 키워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 민족을 위해, 우리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저 야만적인 일제와 싸우려면 우리 민족과 우리 조선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 발로(發露)는 나의 힘을 키우는 것부터다.’

포석은 다시금 생각했다. 나의 힘을 키우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나의 강점을 살려야 하고, 그 강점은 문학이다.

문학에 뜻을 둔 포석은, 문학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애국심과 영웅주의에 들떠 북경행을 시도했다가 둘째형에게 잡혀와 고향 벽암리에서 보낸 5년간의 칩거 생활이 허송세월로 느껴졌다.

 그러나 당시 조선엔 대학이 없었다. 1910년대 말부터 민족주의 진영에서 대학설립을 통해 민족운동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조선총독부와 일본 내각에 조선교육령의 개정과 대학 설립인가를 요청해 일본 내각으로부터 1918년 제정된 대학령에 의해 ‘조선에도 대학을 설립할 수 있다’는 답변을 얻어냈고 조선총독부에서도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대학설립에 대해 민족주의 진영과 협의하겠다는 발표를 얻어냈지만 일본 내각과 조선총독부는 이를 위한 실질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었다.

대학설립에 대해 일제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3.1운동을 전후해 대한제국 말기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의 적립금을 활용해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자 당황한 일본 내각과 조선총독부는 서둘러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민립대학의 설립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1923년 조선에 관립대학을 설립할 것을 발표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거쳐 1924년 설립된 것이 경성제국대학이었다. 당시의 그런 상황으로 포석이 문학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려면 일본 유학 밖에 길이 없었다.

하지만 여비 한 푼 없는 포석에게 일본 동경유학은 그림의 떡이었다. 유학을 가려면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백면서생 포석에게 돈을 번다는 일은 녹록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해야만 할 일이었다. 1919년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3년 동안 뽕나무 장사도 하고 금광을 찾아 돌아다녀보았지만 모두 실패 뿐이었다. 이때 포석은 여기저기 농촌과 도시, 공장 등을 찾아 다니면서 일을 했는데, 그곳에서 보게된 조선 백성의 피폐한 삶은 그에게 큰 아픔으로 각인됐다. 걷잡을 수 없이 급격히 파탄되어가는 서민들의 빈궁한 삶을 보면서, 더욱이 그런 황폐한 삶을 딛고 일어서려는 서민들의 노력이 일제의 이중삼중의 압박으로 또 다시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다시금 되새기곤 했다.

오랫동안 유학을 준비하려 했으나 변변한 노잣돈조차 마련하지 못했던 포석에게 한 친구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 도움으로 포석은 1919년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고 그해 9월 일본 동경동양대학 동양철학과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때 일을 포석은 ‘생활기록의 단편’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동경으로 간 뒤에

북경행을 실패한 뒤에 동경행을 뜻 둔 지는 여러 해이다. 그러나 여비 한푼없이 나설 모험심까지는 나지 아니 하였었다. 혹시 노비나 좀 얻어낼까 하고 뽕나무 장사를 경영하여 보고 금광으로 쫓아다녀 보기도 하였으나 모두 실패 뿐이다. 그러다가 3년을 두고 뜻하던 길을 어느 친구가 들어가는 서슬에 마침 여비도 생기고 하기에 그만 따라 들어가고 말았다.

동경을 오기는 하였다마는 새로 닥치는 여러가지 난문제가 머리속을 뒤흔든다. 학비문제, 나이먹은 문제, 어학문제 등으로 문학을 공부하기에는 절망이라는 생각까지 났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뜻 두고 내려오던 길을 고쳐서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에 괄세치 아니 하리라고 생각하던 어떤 사람을 찾아서 학비 운동을 하였었다. 한번 가서 실패 두번 가서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절망과 모욕과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얼굴이 화끈화끈하도록 상기가 되어가지고 “에끼 빌어먹을 것, 문학이 다 무엇이야. 영어 공부가 다 무엇이야. 지금부터 혼죠(本所)나 후까가와(深川) 같은 데로 가서 품팔이 하자.” 하고 주먹을 쥐며 결심도 하였었다.

“노동인가? 문학인가?”

여기가 내 인생을 좌우할 분기점이었다. 부르주아적 문학 청년의 생활을 동경하던 나, 현실의 검은 장벽이 발 앞에 닥칠 때, 그것을 부딪치고 뚫고 나가지 못하고 회피하여 나가려던 약하고 못난 나, 필경에는 제3차로 학비운동에 나아가서 성공하였었다. 이 근소한 학비를 구차하게도 얻어쓰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날 앉아 생각하면 그때 내 진로에 대하여는 확실히 불행이었다. 유한계급 청년의 사탕핥는 생활을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계속하게 한 것이다. 그것도 지금 생각하면 욕지기가 날 만큼 후회가 된다. 어쨌든 이리하여 나는 ‘하이네’와 친하고 ‘괴테’를 읽고 ‘타골’을 읊고 하였다. 처녀의 눈 속에 감추인 시를 찾아내려 들고 지는 달 웃는 꽃에 신비를 말하려 하였다.

- 조명희, 1927년3월1일, 조선지광 65호.

 가까스로 동경유학까지는 성공했지만, 그곳 생활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보면 그때부터가 포석에게는 가시밭길이었다. 돈이 문제였다. 집안에서 지원해줄 경제적 여력이 없어 여비 마련을 위해 3년 동안 뽕나무 장사나 금광을 쫓아다녔던 터. 그런 상황에서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불성설이었다.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고 멸시까지 당하면서 포석은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으로 유학 온 목적을 늘 잊지 않으려 했다. 힘을 키워 조선의 독립에 역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늘 다시 새기곤 했다.

해서 ‘학비문제, 나이먹은 문제, 어학 문제 등으로 공부하기에는 절망’이라는 생각까지 났지만 ‘오랫동안 뜻두고 내려오던 길을 고쳐서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괄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이를 찾아가 학비를 얻으려 했지만 냉정하게 거절하며 박대하는 것에 절망과 모욕과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돌아와 “에끼 빌어먹을 것, 문학이 다 무엇이야. 영어 공부가 다 무엇이야. 지금부터 혼죠(本所)나 후까가와(深川) 같은 데로 가서 품팔이 하자”며 주먹 쥐고 결심도 했었던 것이다.

어찌어찌하여 학비를 간신히 마련하고서도 포석은 자신의 유학 생활을 ‘유한계급 청년의 사탕핥는 생활’로 반성한다. 이런 유학생활이 ‘욕지기가 날 만큼 후회가 되는’ 포석은 그러면서도 ‘하이네와 친하고 괴테를 읽고 타골을 읊으며 처녀의 눈 속에 감추인 시를 찾아내려 들고 지는 달 웃는 꽃에 신비를 말하려 한’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 조명희의 맏형 조공희가 기거하던 집. 조공희는 조선이 망국적 비운을 당하자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조명희 집안이 애초부터 빈한한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포석의 맏딸 중숙씨의 회고에 따르면 조씨 집안은 ‘인동부사댁’, ‘조대감댁’으로 불렸었다.

조성호씨가 인터뷰한 글을 보면 이와 관련된 중숙씨의 회고가 나온다.

“내가 일곱살에 전의로 갔다가 서울로 갔는데 이때는 생활이 곤궁했지. 필동 단간방에서 아버지는 사과궤짝을 책상삼아 원고를 쓰실 정도였으니. 그러나 진천 벽암리 숫말 살 때는 사대부 양반 집안답게 잘 살았다고. 할아버지가 인동부사를 하셔서 우리 집을 ‘인동부사댁’이니 ‘조대감댁’이니 하고 불렀으니까. 집도 크고 행랑채에 머슴도 몇 있었고 침모, 찬모를 두었지. 세째 큰아버지(兌熙)가 호탕한 성품으로 서울에서 내로라 하는 한량으로 사시는 바람에 가산이 탕진된 셈이지. 작은 부인도 거느리시고 무관 벼슬로 강화부사령, 중추원 참의를 하셨는데 진천 나들이 오실 때는 병졸들을 거느리고 요란했었다.”

그러니까 ‘조대감댁’으로 불리며 진천지역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포석 집안은 그의 셋째형 태희씨가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한량으로 사는 바람에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 포석 조명희의 가계도.

포석의 가계(家系)를 포석의 부친대부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양주(楊州) 조씨 문강공파(文剛公派) 중 창수공파(倉守公派) 내 장육당공파(藏六堂公派) 후손들로, 한학자였던 조병행(趙秉行)은 공희(公熙), 경희(庚熙), 태희(兌熙), 명희(明熙) 네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 조공희는 한학자였던 선친의 영향을 받아 한시집까지 발표했던 인물로 일제의 침탈로 조선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외부와 접촉을 끊은 채 칩거하면서 조국의 망국적 운명을 개탄했다.

둘째 아들 조경희는 조명희가 북경사관학교에 들어가려고 1914년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북경행을 시도하자 뜻은 갸륵하나 설익은 판단이라고 생각해 평양에서 제지해 고향으로 데려온 인물이다.

셋째 아들 조태희는 호탕한 성품으로 무관 벼슬인 강화부사령과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평산 신씨 사이 중흡(重洽·호 벽암碧岩)과 중협(重浹·호 우봉牛峰)을 낳았다. 경성제대 법학부를 나온 조벽암(7)은 시인·소설가·평론가로 문명을 떨쳤으며 1949년 월북하여 ‘조선문학’ 주필, 평양문학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조벽암 시인의 동생인 우봉 조중협(8)은 혜자(수필가·소설가), 성호(수필가·약사), 철호(시인·동양일보 회장·충북예총회장), 광호(뒷목출판사 사장), 남호(교사·작고), 명호(동인건축 대표), 경숙(한국병원 이사)을 낳았다. 포석 조명희와 조벽암, 그리고 조혜자와 조성호, 조철호에 이르기까지 조씨 가계(家系)의 문재(文才)가 맥을 이어온 셈이었다.<매주 월요일 연재>

 (7)조벽암(중흡重洽)

1908년 충북 진천 출생, 1985년 북한에서 사망. 본명은 중흡(重洽). 본관은 양주(楊州). 아버지는 조태희(趙兌熙),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 조벽암은 광복기에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문인이다. 어린 시절 삼촌이었던 조명희의 영향을 받고 자랐으며, 정지용, 이무영, 이흡 등과 교류하며 문학적 역량을 키웠다. 1930년대 중반부터 카프, 구인회 등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일제강점기 후반의 황폐화된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담아냈다. 작품으로 새 아침, 만추사경, 새 설계도, 봄, 향수, 지열, 건식의 길, 구인몽, 농군, 처녀촌, 파종, 취직과 양, 결혼 전후, 노승, 파행기 등.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문학타임즈』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서울특별시지부 중앙집행위원을 지냈으며 건설출판사를 설립, 주보 『건설』을 발행하였다. 1949년 월북, 그 후 ‘조선문학’ 주필, 평양문학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조벽암은 당대 현실의 문제를 작품 내부에 진지하게 적용은 하지만, 정치적 이념을 내세우기보다는 도덕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당시 프로문학의 관념성과 도식성을 개인의 양심과 문학적 기법으로 일정하게 넘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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