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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7>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7>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07.12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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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자처하던 포석은 ‘반항의 길’에 들어서고
▲ 조중흡 벽암.
▲ 조중협 우봉.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넷째 아들 조명희는 조선에서 첫째 부인 민식(閔植)과 사이에 중숙(重淑), 중남(重男), 중락(重洛), 중윤(重潤)을 낳았고, 소련으로 망명한 뒤 황명희와 재혼해 조선아, 조 미하일 명희 예위츠, 조 블라디미르 명희 예위츠를 낳았다. 장녀 조선아는 도서관대학 통신학부를 졸업하고 우스기쁘로워드 호스설계소 도서관 표준본드 주임을 맡았으며 말년에 부친 조명희의 업적을 재조명하는데 진력을 다하였다.
조선아의 아들 김 안드레이는 한국으로 유학와 국문학을 전공한 뒤 고향인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 타시켄트대학 부학장까지 역임했다. 김 안드레이는 자신의 외조부인 조명희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으며, 포석의 업적을 알리는데 힘썼다. 지난 2014년 9월 2일부터 11일까지 9박10일 동안 ‘조명희 답사단’이 러시아를 찾았을 때 그는 현지 가이드를 자청해 답사단에게 큰 도움을 주었었다.
조 선인(미하일 명희 예위츠)는 따스꾸미르 수력발전소 설계기사장을 지냈으며, 포석의 자식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막내 조 블라디미르 명희 예위츠는 종합수력발전시설 기계화 관리국 기사장을 지냈고, 부친 조명희의 업적을 재조명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며 지난 5월 14일 개관한 ‘조명희 문학관’ 건립에 써달라며 20만달러를 보내오기도 했다.
조 블라디미르의 장남 조 파엘은 러시아에서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다. 조 파엘은 모스크바 중심지에 83층짜리 쌍둥이 건물과 본관 등 3개동으로 구성돼 있는 ‘캐피탈그룹’ 본사를 두고 전세계에 지사를 두었는데, 연매출이 수조원에 이르는 큰 기업이다.

조 파엘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의 부친 조 블라디미르 또한 단어 몇 개 주워섬기는 정도다.
그들이 모국어를 쓸수 없었던 데에는 중앙아시아 한인강제이주(9)의 아픈 역사가 있었다. 스탈린 정권에 의해 타시켄트와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쫓겨난 한인들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그곳에서 터전을 잡고 다시금 일어섰다.
스탈린 정권은 강제이주를 시작하기 전에 사전 정지작업을 벌인다. 연해주 지역 고려인 지도자·지식인들을 숙청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때 그 지역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포석 또한 KGB요원들에 체포돼 끌려간 뒤 총살형을 당하게 된다. 그 당시 처형 당한 고려인 지도자가 25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2014년 겨울, 우연한 기회에 한국을 찾은 러시아 한인문학에 조예가 있는 한 인사를 만나게 됐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일보사 기자 출신인 김병학(51·카자흐스탄 한국문화센터소장)씨가 바로 그였는데, 그는 포석과 관련된 의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스탈린 치하 KBG 간부였던 이가 있었는데, 1930년대 말 일본으로 망명을 했어요. 그의 증언에 따르면 포석 선생이 KBG 요원들에게 끌려가실 때 그 단초를 제공한 이가 선생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었죠. 밀고를 했다는 겁니다. 어쩔수 없이 ‘악역’을 맡게 된 것인데, 자신이 살기 위해선 거짓 증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포석 선생께선 당신을 밀고한 이가 누구였는지 알았던 듯해요. 정황상 알고도 모른척 하셨던 것 같아요. 그 제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그 악역을 맡아야 할 상황이었으니까요. 연해주에서 고려인 위원장을 지낸 조세묜(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한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하기 전 체포조였다고 합니다. 한인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생활을 8년 동안 했다고 하는데, 그 딸이 저에게 증언을 해 주었어요. 부친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불복하면 그 즉시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고. 그들의 입맛대로 조서를 꾸미고, 무조건 강요에 의한 서명을 하고, 거부하면 모진 고문이 뒤따랐던 게 당시 끌려간 한인지도자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말입니다.”
김씨는 강제이주 당한 한인들이 모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까닭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스탈린은 소수민족의 권리를 철저히 묵살했지요. 그래서 연해주로 건너온 한인들은 모국의 고급 언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그때 등장한 분이 포석 선생이었지요. 많은 제자들을 키우면서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셨는데, 스탈린 정권은 한인들의 모국어 사용을 금지시켰습니다. 생존하기 위해선 러시아어를 쓸 수밖에 없었고, 또 모국어를 배우려 해도 가르쳐 줄만한 이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절멸하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생활비가 없어 궁핍하고, 학비가 없어 ‘학비운동(학자금 모으기)’에 나섰다가 망신만 당하고 자존심은 밑바닥까지 망가졌던 포석. ‘근소한 학비를 구차하게도 얻어쓰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날 앉아 생각하면 그때 내 진로에 대하여는 확실히 불행’이면서도 ‘유한계급 청년의 사탕핥는 생활을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계속하게 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욕지기가 날 만큼 후회’가 되었던 포석. 포석의 글은 이어진다.

그러나 남과 같이 학교도 다니고 남과 같이 책이나 그득 사서 쌓아놓고 읽으며 먹고 입는데 걱정이나 없었더라면 그때 나의 마음은 만족하였으리라마는 내게는 그러한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간신히 입치다꺼리할 만한 돈은 나오는 데가 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먹고 지내며 빈들빈들 놀며 책권이나 남에게서 빌려오면 그것을 읽으며 거리와 들로 돌아다니기가 일이고 소위 ‘보헤미안’으로 자처하며 건들건들 지내어 왔었다.
이때껏 자기는 이렇다 할 어떤 사상을 잡아 가지지는 못하였었다. 그러나 잘 지내든 못 지내든 생활이 유한하고 보는 책이 그렇고, 사색한다는 것이 그렇고 친구가 그렇고 하여 자기의 생각이 온통 부르주아적 관념세계 위에 소요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한한 처지에 있기는 하지만 빈한의 고통이 없지 못한 터이요, 또한 일본 천지를 풍미하던 ‘럿셀’류의 자유주의적 정신에 감화를 받아 나도 또한 이 사회 이 제도에 대한 불만이 없지 못하였다. 그러던 계제에 지금 옥에 가서 있는 C군, P군이 그때 동경 유학생 틈에서는 처음으로 나아가는 사회운동 분자였었다. 그네들이 회를 만들어 가지고 떠드는 판에 나도 그 속에 끼어 그때는 누구나 최초 자연 발생기에 있어서 필연인 기분시대에 지나지 못하였으며 나도 또한 막연한 기분에만 놀게 되었었다.
그러나 내게는 환멸이 닥쳤다. 동지에 대한 환멸이다. 인간에 대한 불신임안이다. 유심론자들이 으레 하는 말마따나 사회 개조보다도 인심 개조가 더 급하다고 나는 부르짖었다. 이것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영혼 불멸이라든가 인성 즉 선은 영원하다든가 하는 봉건사상에서 나온 고정 관념 위에서 볼 때에는 인간의 마음이라든가, 선악이란 것이 생활환경 그 중에도 사회조직 변천 여하에 따라서 움직이고 변하여지는 줄을 결코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아때껏 봉건적 또는 부르주아적 사상과 분위기 속에서 싹 돋고 자라고 뿌리박힌 감정이나 의식이 좀처럼 바꿔질 수 없는 것도 한 원인이요, 또는 자기가 생활고의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000한(일제 검열로 삭제된 부분) 현 사회 제도에 대한 반항 의식이 생기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그리하여 나는 반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람이라면 욕하고 저주만 하려 하였다. 그 다음에는 자기 차례다. 자기의 추악한 면을 들여다볼 때, 남에게 하던 욕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허무다, 절망이다, 말기 자연주의 문학사상이 가져오는 과학적 숙명론이다.
“떼카단니즘을 잡을까? 종교적 신비주의를 잡을까?” 한 걸음 반항이다. 현실도피다. 신비의 문을 두드리자. 알 수 없는 어떤 엄숙한 님 앞에 즉, 신 앞에 엎드리자. 빌자.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기를 구원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 조명희, 1927년 3월 1일, 조선지광 65호.

이때 쯤 포석은 문학인으로서 아직 사회주의나 사회주의 리얼리즘(10)에 대한 인식이나 생활이 근접돼 있던 것은 아니었다.
‘빈들빈들 놀며 책권이나 남에게서 빌려오면 그것을 읽으며 거리와 들로 돌아다니기가 일이고 소위 ‘보헤미안’으로 자처하며 건들건들 지내어 왔었’던 포석은 ‘이때껏 자기는 이렇다 할 어떤 사상을 잡아 가지지는 못하였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포석은 ‘잘 지내든 못 지내든 생활이 유한하고 보는 책이 그렇고, 사색한다는 것이 그렇고 친구가 그렇고 하여 자기의 생각이 온통 부르주아적 관념세계 위에 소요하고 말았’던 유한계급에 천착해 있는 자신을 책망한다.
그러던 계제에 옥에 가 있는 C군과 P군(이니셜만으로 그가 누구인지 추정할 수 없지만)이 동경 유학생 가운데 첫 사회운동 분자였는데, 그들의 회합에 끼어 보았지만 동지에 대한 환멸, 인간에 대한 환멸을 겪고는 ‘반항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즈음 포석은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차게 된다. 사람이라면 욕하고 저주하고, 종국에는 그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어 스스로의 추악한 면을 들여다 보게 된다. 이는 허무와 절망으로 이어지고, 현실도피로 나타난다.
그러다 결국 포석의 마음이 정착한 것이 ‘구원’이었고, 신 앞에 엎드리며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구원을 위해 신 앞에 빌자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를테면 범신론적 사상이 그의 초기 작품에 녹아있는 것은 동경생활에서 겪은 숱한 방황의 결과요, 또 그의 삶에 일정부분 지침이 되었던 타고르(12)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23년 봄 생활난으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조선으로 귀국한 후에도 더욱 더 깊어진다.

(8) 조중협
1918년 청주 출생. 2010년 9월 7일 사망. 호는 우봉.
충북교육계의 원로, 충북야구협회 고문. 청주고보(현 청주고·8회)를 졸업한 뒤 고향인 청주에서 교편을 잡으며 야구와 인연을 맺은 조중협은 교장으로 부임한 1966년 처음으로 청주 우암초에 야구부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청주 석교초와 내덕초, 제천 의림초, 증평 삼보초, 증평초에 야구부를 창설했다.
증평초에서는 송진우 선수의 재능을 발굴해 우리나라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키워내고 2009년 그의 은퇴경기에서 92세의 나이로 시구를 담당해 야구계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83년 43년 교직생활을 마감한 후에도 충북 아마야구 발전을 위해 헌신해 왔다. 조중협은 포석 조명희 선생의 조카이자 조벽암 시인의 동생이다.

(9) 중앙아시아 한인 강제이주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연해주에 살던 17만∼18만명의 한인들을 시베리아 열차에 태워 하루 아침에 타시켄트,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쫓아냈다. 황무지에 버려진 한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죽어갔다.
한인 강제이주 전 스탈린 정권이 자행한 것은 사전에 지식인들을 처형하는 것이었다. 연해주 지역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포석은 주요 타깃이 된다. 1937년 9월 18일 KGB요원들에게 체포된 포석은 일제 스파이에 협력했다는 누명을 쓴 채 1938년 4월 15일 사형선고를 받고 5월 11일 총살형을 당한다.

(10)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34년 1회 소비에트 작가회의에서 채택된 이후 사회주의 작가가 지켜야 할 창작방법으로서 부동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으며,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탁월성을 상징하는 개념이 되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비판적 리얼리즘과 다른 점은 비판적 리얼리즘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폭로에 그친 데 비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새로운 사회의 건설과 그 과정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한다는 데 있다. 그에 따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비판적 리얼리즘과 달리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표현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두 가지 기본 특징은 리얼리즘과 사회주의적 당파성이다. 기존 리얼리즘의 전통에 사회주의적 당파성을 결합시켜 새로운 리얼리즘을 이룬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기존 리얼리즘과 달리 ‘인민성’, ‘계급성’, ‘당파성’ 그리고 ‘혁명적 낭만주의’를 기본 축으로 구성·발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주의에 오염되면서 현실 사회주의를 변호하는 일종의 관제문학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작품들을 풍부하게 산출했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1933년에 백철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소개한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용 찬반논쟁이 벌어졌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용 찬반 논쟁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어떻게 조선의 현실에 적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고민으로 이어지면서 리얼리즘론의 심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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