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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8>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8>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07.19 2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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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여름, 아름다운 ‘신여성’이 포석을 찾아왔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이러한 생각을 끌고 조선으로 나왔었다. 자기의 생각의 걸음은 점점 더 회색 안개 속으로 들어만 가고 있다. 절대 고독의 세계로 혼자 들어가자. 그 광막한 고독의 세계에서 무릎꿇고 눈 감고 앉아 명상하자. 가슴 속에서 물밀려 나오는 고독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기도하자. 그 기도의 노래를 읊자.

그러면 나는 ‘타골’의 시 ‘기탄잘리’를 한 해 겨울을 두고 애송하였다. 심경을 잘 이해하기는 자기만한 사람이 없으리라는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딴 문제의 꼬투리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가끔가다가 배고픈 고통이 생기는 것이란 말이다. 그럴 때마다,

“아, 요것이 다 무엇이야? 위대한 영혼 앞에 요따위 조그마한 육신의 고통이란 다 무엇이야?”

하였다. 그러나 ‘요것’이란 것이 꽤 맹랑치가 않다. 갈수록 육신을 치기는 커녕 영혼이란 놈을 뒤범벅으로 만들어 놓는다. 처자식들이 굶주림에 운다. 고통의 떡매는 사정없이 두드린다.

“시, 예술이 무엇이야. 육신보다 강하다던 영혼이 어찌 이 모양인가?”

하는 의심이 났다. 그러나 행복하기까지는 아직 어림도 없다.

- 조명희, 생활기록의 단편, 1927년3월1일, 조선지광 65호.

 

타고르(11)의 시 ‘기탄잘리’에 심취했던 포석은 그의 초기 시에도 그러한 세계관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이내 그는 타고르와 고리끼, 양 갈래의 길에서 한 쪽에 대한 선택을 하게 된다. 존재론적 구원이냐, 실재론적 저항이냐를 두고 그는 고민했다. 생활기록의 단편에서 그는 이런 깊은 고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것이 모두 얼마마한 고소거리의 공상이냐, 이때껏 쌓아 올라왔던 관념의 성이란 것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타골’류의 신낭만주의냐, 그렇지 않으면 ‘고리끼’류의 사실주의냐?

“사실주의다. 현실에 부딪치자, 뚫고 나가자.” 하였다.

이때껏 나는 생활 사실이 사상을 낳는지를 모르고 사상이 생활을 낳는 줄만 알았다. 이것만 보아도 자기의 생활 사실이 훌륭하게 새 사상 경지로 나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여기서 현실을 해부하고 비판하여 체험과 지식 위에다가 사상의 기초를 세워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게는 아직까지도 과거 생활에서 달려나온 회의의 꼬리가 자꾸 자꾸 미혹을 일으키게 한다.

“회의 말자.” 하나 고놈의 꼬리가 가끔 와서 눈 앞을 뒤흔든다.

- 조명희, 생활기록의 단편, 1927년3월1일, 조선지광 65호.

 

1920년 동경 유학생 포석으로 다시 돌아가자. 포석은 그해 봄, 김우진(12), 최승일, 김영팔, 홍해성, 고한승, 조춘광 등과 함께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극예술협회(13)를 조직해 민족극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김우진은 포석과 둘도 없는 절친한 벗으로, 후일 포석의 장녀 중숙씨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포석의 가족에게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우진은 호남갑부이자 장성군수인 김성규의 아들이었다.

궁핍한 유학생활로 삶은 매우 고달팠지만 포석은 김우진 등과 교류하면서 극예술협회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 협회는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동우회관’ 건립 기금을 모으기 위해 모국 순회공연을 하게 됐는데 이때 공연된 희곡이 포석의 첫 희곡 창작품 ‘김영일의 사’다.

이런 활동은 한국문학사에 두가지의 큰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포석이 1921년 7월에 쓴 ‘김영일의 사’가 한국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창작 희곡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이 작품 등으로 벌인 전국순회공연 또한 첫번째의 일로, 민족주의 신극운동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 포석이 한국문학사상 첫 창작희곡집인 ‘김영일의 사’를 1923년 간행했던 동양서원. 근대식 화려한 건물 외양이 눈길을 끈다. 이 건물은 1924년께 소유주였던 민준호가 손을 뗀 뒤 무역상동서양행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 1920년대 종로2가에서 여전히 서점겸 문방구로 존속했던 동양서원.

‘김영일의 사’는 1923년 2월 동양서원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단행본은 한국근대희곡사상 두 번째로 간행된 것인데, 첫 번째로 간행된 것은 김영보의 ‘황야에서’(1922년 11월)였다.

그러나 ‘황야에서’는 수록된 다섯편이 외국작품의 번안물이어서 희곡사적 가치가 떨어진다. 이에비해 포석의 ‘김영일의 사’는 순수 창작물이었고, 또 창작된 시기와 공연된 시기가 ‘황야에서’ 보다 앞서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희곡사적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할수 있다.

포석은 1921년 김우진 등과 함께 ‘동우회순회연극단(同友會巡廻演劇團)’을 조직하여 국내순회공연을 했는데, 이때 김우진이 공연비 일체와 연출을 담당했고, 상연 극본인 아일랜드 극자가 던세니의 ‘찬란한 문’을 번역했다.

이 연극운동에 대해 이두현은 “1920년대 참신한 연극운동으로 근대극을 처음 수용한 선구적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포석이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1920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나이 스물 여섯살. 당시 문인들이 등단했던 시기를 살펴보면 빠른 나이라 할 수는 없다. 포석보다 나이 어린 문인들의 이력을 보면 그들의 등단 시기가 포석과 같거나, 더 빨랐음을 알수 있다.

김소월(본명 김정식·1902∼1934년)이 열 여덟살이던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 ‘야의 우적’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했고, 정지용(1902∼1950년)이 휘문고보 시절 요람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것, 주요한(1900∼1979년)이 열 일곱살인 1917년 ‘청춘’지에 낙양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마을집’을 투고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는 것 등을 비교할 때 포석의 문학활동 시기는 다소 늦은 감도 있었다.

 

1921년 여름, 유난히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데다 목이 긴 한 여자가 찾아왔다. 한눈에도 서구형의 아름다운 ‘신여성’이었다. 포석은 이때 김우진, 홍난파 등과 함께 30여명의 청년들로 ‘동우회 순회극단’을 조직해 고국 순회공연을 떠나려고 하던 차였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 동우회의 운영비를 모금하기 위해 조선 순회공연은 진작부터 계획됐던 터였다.

포석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그녀는 이번 조선 순회공연의 ‘프리마돈나’였다.

“어서 오세요, 윤심덕씨.”

“제가 때 맞춰 제대로 찾아 온것 같네요.”

순회극단 단원들의 눈길이 모두 그녀에게로 쏠렸다.

 

(11) 타고르

▲ 타고르

1861년 5월 7일 인도 캘커타 출생, 1941년 8월 7일 캘커타에서 사망. 인도의 시인·사상가·교육자. 인도 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 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13년 ‘기탄잘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동아일보’ 창간에 즈음하여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기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기탄잘리는 1902~1907년 사이에 처자식과 사별한 그가 울적한 심경을 훌륭한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는 위대한 성자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의 아들로 일찍이 시를 짓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 몇 권의 시집을 낸 뒤 시가집 ‘아침의 노래’(1883)로 그의 예술의 기초를 확립했다.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그 작위를 반납했다.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다.

 

(12) 김우진

▲ 김우진

1897출생, 1926년 사망. 호 초성(焦星), 수산(水山). 극작가·연극이론가. 장성군수 성규(星圭)의 아들로, 할아버지도 헌관(獻官)이었으며 지주였다.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농업학교와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24년에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학시절부터는 연극을 꿈꾸어 1920년에 조명희·홍해성·고한승·조춘광 등과 함께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同友會巡廻演劇團)을 조직하여 국내순회공연을 했는데, 이 때 공연비 일체와 연출을 담당했고, 상연 극본인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던세니의‘찬란한 문’(단막)을 번역했다. 대학 졸업 후 목포로 귀향해서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 시기에 시·희곡창작·평론에 몰두해 48편의 시와 5편의 희곡, 20여 편의 평론을 썼다. 그러나 가정·사회·애정문제로 번민하다가 1926년에 동경으로 갔고, 그 해 8월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하여 정사(情死)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난파(難破)’와 ‘산돼지’는 우리 나라 문예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파극만 존재했던 1920년대로서는 대단히 전위적인 실험극이었다. ‘산돼지’는 친구 조명희의 시 ‘봄 잔디밭 위에’에서 암시를 얻어 쓴 작품으로,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음울하게 그리고 있다. 해박한 식견과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

 

(13) 극예술협회

일본 동경에서 문학과 기악(器樂) 등 예술 분야를 공부하던 유학생들이 1920년 봄에 조직한 연극연구단체로 서양의 고전극과 근대극 작품, 특히 셰익스피어·괴테·하우프트만·고골리·체호프·고리키 등의 희곡을 연구하고 토론했다.

주요 회원은 김우진(金祐鎭), 조명희(趙明熙), 유춘섭(柳春燮), 진장섭(秦長燮), 홍해성(洪海星), 고한승(高漢承), 조춘광(趙春光), 손봉원(孫奉元), 김영팔(金永八), 최승일(崔承一) 등. 1921년 여름 동경의 한국 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同友會)에서 동우회회관 건립기금을 모으기 위한 하기순회연극단을 조직해달라고 요청했다. 극예술협회는 순회공연을 통해 그들의 연극운동을 실천하고 고학생을 구제하려는 두 가지 목적에서 이 요청을 받아들여 동우회순회연극단을 조직했다. 1921년 7월 9일부터 8월 18일까지 약 한달 동안 부산, 김해, 마산, 경주, 대구, 목포,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지에서 공연을 했고, 서울 종로 YMCA회관에서 해산식을 가졌다.

1923년에는 형설회순회연극단(螢雪會巡廻演劇團)을 조직하여 6월 9일에 동경 스루가다이(駿河臺) 불교회관에서 시연회를 갖고 7월 6일부터 8월 1일까지 동우회순회연극단과 거의 같은 방향으로 순회공연을 가진 뒤에 곧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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