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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11>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11>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08.09 1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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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포석을 흠모한 한설야
▲ 포석을 평생의 가장 큰 스승으로 여겼던 한설야(맨 오른쪽)는 김기진(맨 왼쪽)과 이광수(가운데)를 누구보다 경계하고 싫어했다. 김기진이 카프의 주도자이면서도 카프 내부를 와해시키는 ‘변절’하게 된 것이 그에겐 더할수 없는 배신으로 다가왔던 것이었고, 이광수는 일제와 야합해 조선인에게 투항주의와 부르주아 연애 지상주의를 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포석이 조선으로 귀국하여 ‘김영일의 사’를 발간한 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즈음, 서울에 새로운 문학단체가 생겼다. 파스큘라(20)였다. 동경에서 귀국한 김기진(21)이 주축이 돼 동조 세력인 ‘백조’ 동인들과 함께 만든 단체였다. 파스큘라는 염군사와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었다.
두 단체가 계급주의 문예운동을 통해 사회주의 실현을 지향점으로 삼았지만, 염군사가 행동적이고 강성인데 비해 파스큘라는 이론적이고 온건했다. 카프를 주도했던 김기진 등 파스큘라의 멤버들은 후일 탈퇴를 선언하면서 카프 구성원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또 염군사가 아마추어적 작가들의 모임이었지만 열성적으로 활동했던데 비해 파스큘라 멤버들과 백조 동인들은 당시 꽤 문명을 떨치던 기성작가군으로 이뤄졌었지만 뚜렷한 행동은 없었다.
그런데 파스큘라를 주도했던 김기진은 포석에게는 참 복잡미묘한 관계의 사람이었다.
팔봉(八峰) 김기진은 고향 충북의 7년 후배였다. 포석의 고향이 진천군 벽암리였고 팔봉은 청원군 팔봉리였다. 벽암리가 교통의 요지로 너른 들판에 사방이 확 트인 곳인데 비해, 팔봉리는 청주서 남이면 척산을 지나 오른편으로 꺾어 가다가 부강쪽 길로 접어들어 안심사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찾아들어야 하는, 구릉성 산지에 둘러싸인 오지였다. 포석이 1919년 9월 도일하여 동경 동양대학 동양철학과에 입학한 이듬해인 1920년 팔봉이 동경에 있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 예과에 들어왔다. 동경 유학생활로 치면 1년 후배였던 셈이다. 막역한 사이여도 좋을 ‘인연’이 있었지만 포석에게 팔봉은 왠지 거리를 두고 봐야되는 사람이었다.
거침없는 성격에 무언가 주도해 나가기를 좋아했던 팔봉과 달리 포석은 음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나서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팔봉이 파스큘라를 주도해 만들면서 ‘인생을 위한 예술(Art for life)’을 주창했지만, 포석에게는 그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조용하지만 원칙주의자였던 포석에게 팔봉은 그리 큰 믿음을 주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이야기할 포석도 아니었지만.
포석을 무척이나 따랐던 한설야, 이기영 등은 김기진과 이광수를 누구보다 싫어했다. 변절자라는 선명한 낙인을 그들은 김기진과 이광수에게 진작부터 찍어두고 있던 참이었다.
포석은 파스큘라의 멤버에 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조금 시간을 더 두고 촘촘하고 효과적이며 사회주의적 실천을 담보해 낼 수 있는 그런 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포석은 늘 했었다.
후일 카프에서 보인 팔봉의 행적과 해방전 친일문학으로 돌아섰던 그를 돌이켜보면 포석이 느꼈던 팔봉의 면면은 정확한 것이었다 할 수 있었다.

1923년 어느날 한 젊은 청년이 포석을 찾아왔다. 사실 포석도 은근히 그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는 1900년 생으로 포석보다는 네살 아래였다. 막힘이 없는 언변에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말하는 열정적인 청년, 한설야(22)였다.

“포석 선생님을 처음 뵙습니다.”
네 살 터울에 선생님이란 호칭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는 끝내 포석에게 선생님의 호칭을 고집했다.
“인제 됐소. 동지같은 새 일꾼이 문화 전선에 나와주어서 맘 든든하오. 나는 이광수를 비판한 선생의 논문을 읽었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깊고도 힘이 있는 목소리. 포석은 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동료 문인들과 예술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한설야는 왠지 믿음을 주는 포석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좋았다. 그리고 포석이 자신에게 ‘동지’라 불러주는 것에 크게 감동했다. 그는 포석에 대한 회고담을 통해 그때 감정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지금도 이 말을 어제런듯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 말에서 나에게 대한 평가를 느낀 것보다 동지란 그지없이 귀중한 것이고 진정한 동지란 전투 속에서 맺어지는 것이니 우리의 전투를 위해서 항상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그런 말로 들었으며 또 그 말하던 때의 조명희선생의 인상이 역시 그랬다.
생각하면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그때 뿐 아니라 일생에 걸친 귀중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를 전투애로 이끌어주는 말이었고 나의 앞으로의 노선을 잡아주는 말이었다.
- 한설야, ‘정열의 시인 조명희’, 1957년 8월, 1959년 조명희선집 수록.

한설야에게 포석은 동지이자, 사상적 스승이요, 삶의 바른 좌표를 일러주는 롤 모델이었다.
그에게 포석은 첫 만남부터 더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목소리부터 행동, 생각과 사상, 글, 삶의 방식 등 어느 것 하나 본받고 싶지 않은 것이 없었다. 참으로 매력적인 분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느낌을 한설야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내가 처음 조명희선생에게서 받은 인상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 특히 그의 표정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바로 그와 대화하는 것처럼 분명히 그의 얼굴과 그 얼굴에서 풍기는 ‘정신’을 보고 있다.
그는 찹찹하고 부드러운 긴 머리카락을 귀로 쓰다듬어 넘기면서 느린 어조로 이야기 했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다시 뺨으로 흘러 내리면 이번엔 그것을 잡아다가 귀바퀴에 걸어 놓았다. 그것이 마치 정열적인 이야기를 방해하는 놈은 이렇게 잡아 앉혀야 한다는 것 같이 보여서 우습고도 재미있어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그의 가느스럼한 눈초리와 그 눈초리 끝에 새겨지는 가느다란 주름살이었다. 그의 따스하고 다심한 심정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자로 그의 실눈에 실려 오르며 옅은 웃음을 지을 때마다 눈초리 끝에 가는 주름이 잡히는 것이었다.
그 담은 그의 목소리다. 결코 높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드럽고 따사로우면서도 깊은 감정이 그윽히 흐르는 목소리였다.
나는 벌써 그맘때부터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주는 빛깔을 연상하고 거기서 착한 것, 악한 것을 찾아내는 버릇이 생겨 있었는데 그때 나는 조명희 선생의 목소리에서 노랑빛을 느꼈다.
어째서 그의 목소리가 그의 정열과 같이 붉은 빛깔로 나에게 생각하게 하지 않았는지 그것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억지로 끌어다 이치를 맞춘다면 그의 붉은 마음 추구하는 것은 바로 싸움을 넘어선 평화였던 때문이 아닌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나 나는 이 해석에 자신은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첫 인상이 나에게 ‘동지’, ‘전투’, ‘평화’…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하였던 것만은 지금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이다.
- 한설야, ‘정열의 시인 조명희’, 1957년 8월, 1959년 조명희선집 수록.

‘정열의 시인 조명희’를 통해 한설야는 포석과의 첫 만남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작가로서의 실력이 약한 시골뜨기 문학청년에 불과한 자신에게 포석은 과분한 칭찬과 기대감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그래서, 욕심만은 많은 한설야가 부르주아 작가와 작품 때리기에 열중하면서 그 첫 타깃을 ‘부르주아 문학의 지도급 작가’인 이광수(23)로 잡았을 때, 해서 조선 사람의 머리를 가장 어지럽히는 이광수의 문학을 폭로 분쇄하고자 나섰을 때 오직 포석만은 이런 한설야의 행동을 ‘비싸게’ 쳐주었던 것이다.
포석 또한 신진 비평가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던 한설야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처럼 버릴수 있을 만한 투사적인 그의 면면과 더불어 뜻이 통하는 동지에게는 그지없이 부드러운 그의 선한 얼굴,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양까지, 포석에게 한설야는 다층의 매적적인 얼굴을 가진 동지이자 후배이자 동료였다.
그러나 이 둘의 인연은 포석이 1928년 포석이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끝나는데, 1938년 포석이 총살 당한 것도 까마득하게 몰랐던 한설야는 포석을 찾아 러시아를 헤매기도 했었다.

 

(20) 파스큘라(PASKYULA)
1923년경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문학단체.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조직되기까지 계급주의 문예운동의 일부를 담당했다. 1923년 동경에서 귀국한 김기진(金基鎭)과 그에 동조한 ‘백조’ 동인들 일부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문학 조직으로 그 구성원은 박영희(朴英熙), 이익상(李益相), 이상화(李相和), 김형원(金炯元), 김기진, 연학년(延鶴年), 안석영(安夕影), 김복진(金復鎭) 등이다. 파스큘라의 명칭은 이들 구성원의 성 또는 이름의 첫 문자들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파스큘라는 염군사(焰群社)에 비해 그 구성원이 대부분 동경 유학생 출신으로 교양의 정도가 높은 편이었고 ‘백조’ 동인들이 주축이 됐기 때문에 문학 활동의 유래도 오래됐다. 파스큘라는 염군사와 합동하여 프롤레타리아문예운동의 조직적인 전개를 목적으로 하는 카프를 결성하고, 그 조직 활동에서 주도권을 장악했으나 뒤에 프로문학운동이 이데올로기 일변도로 쏠리자 모두 이탈했다.

(21) 김기진(金基鎭)
1903년 충북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출생, 1985년 사망. 문학평론가·소설가. 호는 팔봉(八峰).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1920년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 예과(豫科)를 거쳐 본과(本科) 1년을 중퇴했다.
1922년 일본 유학 당시 박승희(朴勝熙)·이서구(李瑞求) 등과 함께 신극운동의 발판으로 조직한 ‘토월회(土月會)’를 2차 공연(1923년 9월)을 끝으로 탈퇴하고, 김복진(金復鎭), 안석영(安夕影), 이익상(李益相), 박영희(朴英熙), 이상화(李相和)와 함께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예단체를 조직, ‘인생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는 새로운 경향의 문예운동을 전개했다. 1923년 매일신보(每日申報), 시대일보(時代日報), 중외일보(中外日報) 등에서 약 17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 1925년 그가 주도한 카프시대의 문학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는 한 단계를 이루었다. 박영희와 함께 프로문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그는 1938년 7월 3일 시국대응 전선사상 보국연맹의 결성위원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노선으로 전향했다. 1944년 중국 남경(南京)에서 열린 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이광수와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6·25남침 때에는 공산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0년 경향신문(京鄕新聞) 주필을, 1972년 한국펜클럽과 한국문인협회의 고문을 역임했다.

(22) 한설야(韓雪野)
소설가, 평론가. 1900년 8월 3일 함남 함흥 출생, 1962년 북에서 사망 추정.
1919년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북청사립중학교 강사로 지내다, 1925년 단편소설 ‘그날 밤’(조선문단)을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카프에 가담했으며 1934년 극단 ‘신건설사’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그 뒤 귀향하여 소설 창작에 전념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40년 국민총력조선인연맹 등 단체 활동했고, 1945년 광복 당시 이기영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조직했다. 다음해인 1946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조직하여 북한공산당의 문화예술계의 주동적 구실을 담당했다. 초기 김일성 체제 아래에서는 문화선전상 등의 요직을 거쳤으나, 소련에서의 스탈린 격하 시기에 김일성 반대 세력에 동조하다가 1960년대 초기에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집으로 ‘청춘’, ‘귀향’, ‘한설야단편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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