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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15>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15>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5.09.13 1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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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를 용납 안한 포석, 막역한 친구 공초를 버리다
▲ 1941년 ‘신천지’ 11월호에 수주 변영로가 쓴 ‘명정사십년 무류실태기’에 실린 삽화. 대취한 네 명의 문우(文友) 수주 변영로와 공초 오상순, 성재 이관구, 횡보 염상섭이 암소를 타고 경성으로 진출하는 장면이 익살스럽게 묘사돼 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포석과 달리 공초 오상순과 수주 변영로(29)는 입이 헌한데다 술고래였는데, 수주는 큰 바가지 하나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킬만큼 말술이었다. 그리고는 포석댁에 누워 사흘을 꼼짝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가까웠던 세 사람이었는데, 포석은 왜 공초 오상순을 상종하지 못할 인물로 여기게 되었을까.

이는 아마도 그의 작품성향과 사상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20년 김억, 남궁벽, 염상섭, 황석우 등과 함께 ‘페허’ 동인이 된 오상순은 1919년 3.1운동의 좌절을 겪은 뒤 조선에는 희망이 없다고 여겨 어둡고 절망적이고 퇴폐적이고 허무적인 풍조의 시를 많이 발표했다. 그가 보여주었던 수많은 방랑과 기행(奇行)까지는 포석이 받아주고 이해해 줄 수 있었지만, 패배주의적 사고방식 만은 끝내 용납할 수 없었던 듯싶다. 공초는 1920년 ‘페허’ 창간호에 평론 ‘시대고와 그 희생’을 발표하면서 ‘폐허’는 그것을 극복해서 낙원을 찾는 긍정적 의미가 있다면서 ‘폐허’를 옹호하고 허무의 극복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에 발표한 시 ‘허무혼의 선언’, ‘아시아의 밤’, ‘타는 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이론에 맞도록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웠던 포석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허무적이고 퇴폐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공초의 삶과 문학은 그에게 실망을 넘어 분노로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보면 포석은 그런 삶을 살았다. 음전한 미소에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 나직한 목소리로 상대방을 압도하면서도 정작 힘이 없는 사람일수록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자신의 입지 앞에 두는 삶. 그러면서도 포석이 준엄하고 꼿꼿하게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포석의 삶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두 개의 키워드, 그것은 조선의 독립과 민중을 향한 사랑이었다.

 

여기서 잠깐 곁길로 에돌아 수주와 공초 이야기로 가보자.(김하리의 ‘세상 모든 이야기 房’ 참조)

수주와 공초가 벌인 기행(奇行)은 그 내용이 어찌나 ‘파격적’이었던지 당시 경성사람들은 수주와 공초라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수주는 술로 산 40년 인생을 술회한 글을 1949년 잡지 ‘신천지(新天地)’에 연재했는데, 수주는 후에 이 이야기를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이란 단행본으로 묶었다.

말술, 주신(酒神), 주호(酒豪), 국보급 주객(酒客)으로 통하던 수주는 술을 마셨다고 하면 끝장을 보는 성미였다고 한다.

술이 수주라면, 담배 하면 공초였다. 그의 아호도 ‘꽁초’ ‘골초’라는 단어를 연상케 하는 공초(空超)다.

둘은 모두 문예지 ‘폐허’ 동인으로 식민지 지식인의 설움을 술과 담배로 달랬다.

 

▲ 변영로가 자신의 40년 술인생을 ‘신천지’ 연재 후 단행본으로 펴낸 ‘명정사십년’ 표지(왼쪽 사진)와 1949년 발간된 신천지 11월호.

수주가 서울 혜화동에 살던 어느 날 주도(酒道)의 명인인 공초 오상순, 성재(誠齋) 이관구(李寬求),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이 내방했다. 그 자리에 술이 빠져서는 안될 노릇. 그러나 네 사람의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원(圓)’밖에 안됐다. 당대 주당들인 그들에게 그 돈은 ‘해갈’에 그칠 뿐인 액수였다고. 해서 수주는 사동(使童) 하나를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동아일보 송진우(宋鎭禹) 편집국장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 내용은 ‘좋은 기고를 할 터이니 50원만 보내달라’는 것. 그러나 송 국장이 진짜 돈을 보내올 지는 알수 없는 일.

“거절을 당한다든지 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10분, 20분, 30분, 한 시간 참으로 지루한 시간의 경과였다. 마침내 보냈던 아이가 손에 답장을 들고 오는데 우리 4인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듯 한군데로 집중했다. 직각(直覺)도 직각이지만 봉투(封套) 모양만 보아도 빈 것은 아니었다.”

- 1949년 ‘신천지’ 11월호 ‘명정사십년 무류실태기’.

 

사동이 가져온 봉투 속에는 진짜 거금 50원이 있었고, 수주의 제안으로 말술에 고기 몇 근 사서 성균관 뒤 사발정 약수터로 야유(野遊)를 가기로 정했다고 한다.

객담(客談)·농담(弄談)·고담(古談)·치담(痴談)·문학담(文學談)을 안주 삼아 쾌음(快飮)·호음(豪飮), 권커니 자커니 하다보니 쪽빛같던 하늘이 어느새 먹장구름으로 뒤덮이고 장대비가 쏟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몸으로 고스란히 장대비를 받아내다 보니 객적은 호기가 슬슬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오상순이 “옷이란 대자연과 인간 둘 사이의 이간물(離間物)인 이상 몸에 걸칠 필요가 없다”며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찢어버리자”고 제안했다. 대취한 4명의 나한(裸漢·벌거벗은 부처)은 빗속에서 광가난무(狂歌亂舞)를 즐기다 언덕 아래 소나무에 소 몇 필이 매여 있음을 발견하곤 발가벗은 채 그 암소를 거꾸로 타고 종로 보신각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몰려든 사람들은 차마 보지 못할 그 꼴에 아우성을 쳤고 말을 타고 달려온 일본 순사는 기가 죽어 쩔쩔맸다고 한다.

 

1921년 문예지 ‘장미촌’ 창간 때 그것을 기념하여 YMCA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시낭송회가 열렸는데 담배없인 못살던 공초도 발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역사적인 행사에서 공초는 한 손에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상아 물부리를 들고 단 위에 올라가 장시(長詩) ‘아시아의 밤’을 근엄하게 읽어내려갔다.

“밤에 취하고 밤을 사랑하고 밤을 즐기고 / 밤을 탄미(嘆美)하고 밤을 숭배하고 밤에 나서 / 밤에 살고 밤 속에 죽는 것이 아시아의 운명인가.”

그러자 야유가 터져 나왔다.

“웬 서양 거지가 알 수 없는 밤 타령이냐, 담뱃불이나 꺼라.”

대학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한 공초는 서른 전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서른을 전후해 우연히 피우기 시작한 것이 아주 고질이 돼 버렸다고 한다.

“늦게 배운 도적질이 밤새는 줄 모르는 격으로 그 후 30여 년의 오늘까지 세수하는 동안 밥 먹는 동안을 제외하고 잠이 깨는 시간부터 잠들 직전 순간까지 담배를 물고 지낸다. 처음 흡연 이유나 동기는 막연한 ‘순수 애연(愛煙)’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육체 주변의 허공 속에 자연(紫煙)이 엉기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다가 드디어는 그것이 사라져 가는 것을 이윽히 바라보는 소견법(消遣法)에 마음이 끌리었었다.”

- 1956년 ‘현대문학’ 7월호.

그리고 급기야 ‘연아일체경(煙我一體境)’이란 말로 자신의 애연관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순수 애연’이던 것이 차츰 생활철학을 해오는 동안, 과도한 긴장상태와 완만(緩慢)상태의 템포를 조절하고, 조정하고, 나아가서는 조화하는 바를 효험함으로써 이제는 연아일체경(煙我一體境)에 산다고나 할까.”

- 1956년 ‘현대문학’ 7월호.

공초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정신을 잃는 바람에 소지품을 잃어버려도 손에 쥔 담배 파이프는 잃어버리지 않았고, 문우들이 그의 손에서 파이프를 빼내려 했지만 도무지 빠지지 않더라고 했다.

 

(29) 변영로(卞榮魯)

▲ 수주 변영로

1897년 5월 9일 서울 출생, 1961년 3월 14일 사망. 호는 수주(樹州).

서울 재동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년 졸업을 앞두고 퇴학당했다.

1918년 중앙학교 영어교사가 되었고, 이때 명예졸업생으로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에 발송하는 일을 맡았고, 1920년에는 ‘폐허’의 동인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신천지에 ‘소곡 5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에 펴낸 시집 ‘조선의 마음’으로 한국문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으로 부상했다. ‘폐허’의 동인이면서도 ‘백조’류의 낭만성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영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했으며,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대학에 입학해 2년 동안 공부했다. 1933년 귀국해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주간, 신동아 편집장 등을 역임했으며, 문우회관(文友會館)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취임했다가 1955년 ‘불감(不感)과 부동심(不動心)’이 ‘선성모욕’(先聖侮辱)이라는 필화사건으로 사직했다. 1954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이듬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48년 1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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