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잔디밭 위에’는 한국 시단에 새로운 금자탑

▲ 1923년 ‘해파리의 노래’를 발간한 안서 김억(왼쪽). ‘해파리의 노래’는 한국 최초로 발간한 창작 시집이었으나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태서문예신보와 창조, 새벽 등에 이미 발표했던 것을 한데 묶어낸 것이어서, 미발표된 순수 창작 시편들을 모아 발간한 포석의 ‘봄 잔디밭 위에’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할 수 있다. 김억은 포석이 잡지 개벽에 선보이며 등단하게 된 신작시 5편에 대한 시평을 쓰기도 했다. 최인훈(오른쪽)은 1995년 동양일보 출판국에서 발간한 조명희 전집 머릿말에서 포석의 삶과 문학에 대해 “(포석이) 인간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탐구에서 얻어진 판단에 생애 자체를 일치시키려고 한 치열한 의식의 의미는 지금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생활과 예술에서의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사실 정확하게 따지자면 ‘봄 잔디밭 위에’는 김억(33)의 ‘해파리의 노래’와 이학인의 ‘무궁화’에 이어 세번째로 간행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억이 1923년 발간한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그가 태서문예신보, 창조, 개벽 등에 이미 발표했던 것을 묶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과, 이학인의 시집이 조명희의 시집보다 5일 먼저 나왔으나 일제에 의해 곧바로 압수돼 그 다음해에 발행되었다는 점을 비춰볼 때 진정한 의미의 조선 최초의 창작 시집은 조명희의 ‘봄 잔디밭 위에’로 볼 수 있다.

시집이 한 작가가 세상을 향해 제시하는 세계관과 우주관, 가치관 등이 육화돼있는 것이라 할 때, 조명희의 ‘봄 잔디밭 위에’는 조선 최초로 ‘시인의 자아’가 독자들과 조우하는 뜻깊은 사건이었다 할 수 있다. 포석의 ‘봄 잔디밭 위에’는 한국 시단에 하나의 금자탑이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포석을 문인으로 부를 수 있는 시기를 언제로 보아야 할까.

포석이 문학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동경유학 중 극예술협회에 가담한 1920년도였다. 이 해에 그는 희곡과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데뷔시기는 희곡으로 데뷔한 시기와 시로 등장한 시기가 각각 다르다. 그의 처녀작인 희곡 ‘김영일의 사’가 동우회 순회연극단에 의해 국내에서 공연된 것은 1921년 7월. 이때 그는 이미 극작가로서 데뷔한 셈이다. 그 당시 포석은 비록 기성인이 아닌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이 연극이 전국적인 호응을 받았고 근대 민족극 운동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의 데뷔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극작가로서의 그의 데뷔 작품은 ‘김영일의 사’이고, 그의 데뷔시기는 공연된 바로 그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시인으로 공식 등단한 해는 1924년이다.

1924년 1월에 그는 잡지 개벽에 다섯편의 신작시를 선보였다. 이 시편들은 그 다음달 안서가 월평으로 다루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작품들을 그의 데뷔작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그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하여 시인으로서의 선구적 활동을 했던 것이다.

포석이 개벽에 선보인 신작시에 대해 안서 김억은 이렇게 평했다.

 

조명희군(趙明熙君)의 시(詩) ‘경이(驚異)’ 외(外)의 사편(四篇) 시(詩)에는 경이의 신비(神秘)를 노래하면서, 인생(人生)의 영구(永久)한 모순(矛盾)과 애소(哀訴)를 을펏다. 그는 인생(人生)의 깁흔 속에서 울부짓는, 불안(不安)에 싸인 영(靈)을 통곡(痛哭)한다. 그러기에 그의 시에는 내면(內面)을 향(向)하야 나아가는, 눈물에 싸힌 영의 새빨간 눈알이 보인다.

가뷔얍은 보조(步調)가 아닌 무겁고도 괴롭은 듯한 보조에는 고적(孤寂)하고도 엄숙(嚴肅)한 순난자적(殉難子的) 발자최가 잇다. 더러 무겁고도 괴롭은 보조에서 울어나오는 발자최가 잇섯으면 하는 말을 작가(作者)에게 들이고 십다. 그러고 더더 색캄한 어둡은 곳으로 들어가서 실컷 영(靈) 큰 울네주엇으면 한다. 지금(只今)의 그이외 시의 세계(世界)에는 밝음과 어둡음이 혼동(混同)되야, 길이 분명(分明)치 아니하다. 이 작가(作者)에게서는 색캄한 길이면 색캄한 길일사록 더더 큰 영의 애소 가득한 통곡을 들을 수가 잇다.

‘경이’도 조흐나 ‘영원(永遠)의 애소(哀訴)’는 피상(皮相)이다. 도로혀 ‘무제(無題)’에서는 좀더 깁피 잇는 영(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잇다.

 

主여!

그대가 運命의 箸로

이 구덕이를 집어 世上에 드러트릴제

그대도 웅당 矛盾의 한숨을 쉬엿으리라,

이 모욕(侮辱)의 ‘탈’이 땅우에 나둥겨질제

저 맑은 햇빗도 웅당 찡그렷으리라.

 

오오 이 더럽은 몸을 엇지하여야 조흐랴

이 더럽은 피를 엇다가 훌너야 조흐랴,

主여, 그대가 만일 永永 버릴 物件일진대

차라리 벼락의 榮光을 주겟나잇가,

벼락의 榮光을! (無題)

 

시구(詩句)의 용어(用語)로 맘에 맛지 아니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업지아니하다, 만은 아직은 이만하고, 다만 예술(藝術)은 표현(表現)을 가장 중요시(重要視)함은 물론(勿論)이거니와, 더욱 시에는 표현의 한 방법(方法)으로 용어에 대(對)하야 만혼 주의(注意)와 민감(敏感)이 필요(必要)하다는 한마듸를 더한다.

- 김안서(金岸曙), 시단산책(詩壇散策), 개벽, 1924년 4월.

 

포석이 추구했던 문학의 본령(本領)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인생 전반을 두루 살펴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문학적 코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실현’이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실현이 담보하고 있는 것은 일제 압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조선의 독립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 작품에는 범우주적, 존재론적, 구원을 지향하는, 그런 몸짓들이 상당수 보인다.

포석의 한국문학 활동시기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희곡과 시에 주력했던 시기와 단편소설과 수필에 주력했던 시기가 그것이다. 희곡과 시에 주력했던 시기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이다. 그는 1925년 2월 개벽지에 단편소설 ‘땅속으로’를 발표하면서 시보다 단편소설과 수필에 주력했다.

그의 작품연보를 살펴보면 1926년 이후 소련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시기에는 거의 시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포석은 소련으로 망명한 뒤 ‘짓밟힌 고려’(1928년 10월), ‘아우 채옥에게’(1935년 3월 8일), ‘까드르여, 너의 짐이 크다’(1935년 6월 30일) 등 산문시 세 편을 썼다. 또 1931년 ‘볼쉐비크의 봄’과 ‘녀자 돌격대’, ‘10월의 노래’를, 1933년 ‘무제’, ‘맹서하고 나서자’, ‘5월 1일 시위 운동장에서’를, 1937년 ‘아무르를 보고서’, ‘공장’ 등의 시를 썼다.

포석이 조선에서 1925년부터 시 대신 소설과 수필에 주력하게 된 것은 목적의식기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선구적 소설 ‘낙동강’(1927년 7월 1일, 조선지광 69호)을 배태시키는 시그널이 아니었나 싶다.

연대기적 서술에 따라 ‘1927년의 포석’에서 다루겠지만, 낙동강은 포석의 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화두’의 작가 최인훈(34)이 포석의 ‘낙동강’을 두고 평한 내용의 일단을 살펴본다.

 

식민지 권력의 감시와 탄압 아래에서 모국어를 지키면서 국민 생활을 묘사해 온 문학사회에도 역사의 기상은 정직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포석 조명희는 그런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문학적 유파에 속해 있었다. 당시의 현실과 그에 대한 문학적 반응 태도를 뚜렷이 나타내주는 것이 그의 작품 ‘낙동강’이다.

‘낙동강’에서 그는 조국의 운명과 자신의 태도를 종합해서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문학 자체를 종합하고 있다.(중략)

내용과 형식에서 ‘문학’이 전제하고 있어야 할 어떤 본질이 식민 통치하에서 가능한 한계를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문학이란 과연 무엇이고, 인간사회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과 우리를 직면하게 하는 것, 이것이 포석 조명희의 문학과 생애가, 특히 망명 후의 그의 존재가 우리 문학사에 대해서 지니는 최대의 의미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런 탐구는 포석의 생애의 비극적 경위 때문에 지금 막 출발하였다. 조명희라는 이름에서 금제의 봉인이 떨어진 것은 바로 어제의 일이다. 문명의 보통 상식이 통하게 되는 일이 20세기의 우리 생활의 어디에서나 그랬던 것처럼, 포석이라는 한 사람의 망명작가에게 연구적으로 접근하는 일도 이렇게 지연되었다. 그러나 금제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 인간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탐구에서 얻어진 판단에 생애 자체를 일치시키려고 한 치열한 의식의 의미는 지금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생활과 예술에서의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 최인훈, ‘문학사에 대한 질문이 된 생애’, 1995년 3월 20일 포석 조명희 전집, 동양일보 출판국 간행.

 

(33) 김억

호는 안서, 안서생(岸曙生), 김안서. 1896년 출생, 사망 미상.

처음 이름은 희권(熙權)이었으나 뒤에 억(億)으로 개명했다. 필명으로 안서, 안서생(岸曙生), A.S., 또는 본명 억(億)을 사용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 출생 연도는 호적상으로 1896년으로 되어 있는데, 김억 유족의 말에 의하면 1895년이라고 한다.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거쳐 1913년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영문과에 진학하였다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 뒤 1916년 오산학교와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원을 역임했고, 1924년 동아일보사와 매일신보사 기자를 지냈으며, 1934년 중앙방송국에 입사하여 부국장까지 지냈다. 6.25 한국전쟁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의 계동 집에서 납북됐다. 그 뒤의 행적은 확실하지 않다.

문단 활동은 1914∼1915년 ‘학지광(學之光)’에 시 ‘이별(離別)’, ‘야반(夜半)’, ‘나의 적은 새야’, ‘밤과 나’ 등을 발표한 것을 시발점으로, 1918년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번역과 소개 및 창작시를 발표함으로써 본격화됐다.

그 뒤 창조와 폐허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창조(創造), 폐허(廢墟), 영대(靈臺), 개벽(開闢), 조선문단(朝鮮文壇),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시·역시(譯詩)·평론·수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1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진 프랑스 상징파의 시와 타고르·투르게네프 등 해외 문학의 번역·소개에 있어서의 구실과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 과정에 그가 남긴 공적은 매우 컸다.

1923년에 간행된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한국 최초의 근대시집으로서, 프랑스 상징주의의 시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은 기존에 발표한 시들을 묶어 엮어낸 것이기에 진정한 의미의 한국 최초 창작시집은 포석 조명희의 ‘봄 잔디밭 위에’로 보는 이들이 많다.

김억은 김소월(金素月)의 스승으로 김소월(정식)을 민요시인으로 길러냈다.

저서로는’불의 노래’(1925), ‘안서시집’(1929), ‘안서시초’(1941), ‘먼동이 틀제’(1947), ‘안서민요시집’(1948)이 있고, 역시집으로 ‘오뇌의 무도’와 타고르의 시집 ‘기탄자리’(1923), ‘신월’(1924), ‘원정’(1924), 잃어진 진주’(1924)가 있다.

 

(34) 최인훈(崔仁勳)

1936년 4월13일 함북 회령 출생. 소설가, 극작가.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목포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중퇴했다. 육군통역장교로 군복무하고 제대 후 글쓰기에 전념했다. 1959년 ‘자유문학’ 10월호에 ‘그레이구락부 전말기’, ‘라울전’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60년 ‘가면고’, ‘광장’ 등을 발표하면서 작가적 명성을 굳혔다.

4.19혁명 직후에 발표한 ‘광장’은 당대까지 금기시되었던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파헤친 대표작이며, 작가 자신도 책머리에서 자유당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 아래에서는 발표가 불가능한 작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발표 직후 최대의 문제작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문단에 정치적 허무주의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광장’에서 제시된 분단문제는 ‘크리스마스 캐럴’, ‘회색인’, ‘서유기’로 이어졌으며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서는 분단시대 지식인의 모순과 갈등으로 그려졌다. 그밖에 ‘총독의 소리’, ‘주석의 소리’는 불안의식을 정치적 차원에서 그린 정치소설이라 할 수 있다. 소설집으로 ‘광장’(1961), ‘총독의 소리’(1967), ‘태풍’(1973), ‘왕자와 탈’(1980) 등과 희곡집으로 ‘옛날 엣적에 훠어이 훠이’(1979) 등이 있다.

197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최인훈전집’(12권)을 펴냈다. 1966년 동인문학상, 1977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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