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다. ‘분노는 도덕과 용기의 무기가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아리스토텔레스) ‘목표가 방해받거나 위협을 느낄 때 대처할 수 있도록 만든다. 자신과 자신의 것을 보존하기 위한 반응이다. 자기와 자기사람이나 물건에 공격을 받아서 위험이나 손실이 발생하면 촉발되는 감정이다.’(김광수 ‘감정커뮤니케이션’

복녀의 얼굴에는 분이 하얗게 발리어 있었다. 신랑신부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 광경을 무서운 눈으로 흘겨보면서, 그녀는 왕 서방에게 가서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녀의 입에서는 이상한 웃음이 흘렀다. ‘자 우리 집으로 가요.’(김동인의 ‘감자’)

‘매 맞은 개가 짖는다’는 미국 속담이 있다. 왕 서방이 새색시를 맞이하는 것은 복녀에게는 분기탱천할 만한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새색시가 들어오는 첫날밤에 복녀가 왕 서방 집에 가서 강짜를 부리는 것이다.

사실 복녀의 분노에 찬 행위들은 모두 실정법상으로는 가중처벌감이다. 그녀는 유부녀로서 다른 남자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져왔으며, 왕 서방의 집에 무단주거침입을 하였고, 왕 서방 부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왜 복녀에게서 연민의 마음을 느끼는 것일까?

복녀의 내면에 숨겨진 사랑 때문이다.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뭇 남성들과 왕 서방에게 수시로 성을 팔았지만, 복녀의 내면에는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이 잠복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왕 서방이었다. 왕 서방이 새색시를 얻게 되면서 숨기고 있던 사랑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인간의 큰 행복이며 권리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으며 사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다. 인간은 모두 이런 삶을 꿈꾼다. 복녀가 꿈 꾼 세상도 이런 세상이었다. 그런데 왕 서방이 새색시를 얻는 순간 그 꿈이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다. 그녀에게 사랑 없는 삶은 죽는 것만 못하였다. 그녀는 죽음으로 죽음과 맞바꿀 유일한 가치는 사랑이라고 산 사람들에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 사랑이 전부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집안의 반대에 분노하여 죽음을 선택했고, 춘향이는 탐관오리의 탐욕에 저항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사랑을 지켰다. 백치 아다다는 남편의 변심에 분노하여 돈을 뿌리고 자유의 바다로 떠내려 갔으며, 천재작가 김우진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그들이 죽음으로 남긴 분노의 가치 또한 ‘사랑이 전부다’이다.

혈기에 찬 분노는 있어서는 안 되고 이(理)와 의(義)에 찬 분노는 없어서는 안 된다(주자) 주자가 말하는 이와 의의 분노는 공적인 분노를 뜻한다. ‘종교보다도 더 거룩한 분노’(‘논개’)는 의에 찬 분노이다. 목숨과 바꿀 만한 의의 가치를 지닌 분노이다. 험한 시대일수록 사회는 한쪽으로 심하게 기운다. 그때 의에 찬 공적인 분노는 기우는 사회의 균형을 잡아주는 기둥역할을 한다.

작게 분노한 사람은

작게 사랑한 사람이었고

크게 분노한 사람은

크게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

분노가 하늘에 닿은 사람은

사랑이 하늘에 닿은 사람이었고

분노가 호수의 물결로 일었다 사라진 사람은

사랑도 사라진 사람이었습니다

……

불꽃보다 뜨거운 사랑에

육신을 벗어버린 사람도 있었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랑에

미쳐버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의 깊이만큼 변했습니다

(노영민 시 ‘분노’ 중에서)

시간이 흐른 뒤에 광폭한 시대에 맞섰던 분노를 회상하고 관조한 시이다. 거리엔 분노로 가득하고, 하늘에 포연이 가득했던 그 시절. 시인은 그 때를 돌이켜 보면서, 분노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이며, 분노의 지속성은 사랑의 지속성이고, 분노가 깊은 이는 육신을 벗어던지고 분노가 얕은 이는 물결처럼 사라졌음을 아픈 마음으로 추상한다.

공적인 분노의 에너지가 한데 어우러져 지속적으로 분출하였기에 우리는 그렇게 갈망하던 민주화를 이뤄냈다. 공적인 분노는 이처럼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얻어내는 힘이 있다. 이 소중한 가치를 얻었을 때 분노는 우리를 부정적인 기억에서 해방시킨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게 하는 중요한 힘이 된다.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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