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의 교우·문학적 관계 등 인간 조명희에 대한 토론… 다양한 관점으로 포석을 말하다

● 주제발표
△양승국 서울대 교수
△박진숙 충북대 교수

● 토론 (가나다순)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장
△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문학평론가
△오만환 시인·진천문인협회장
△정연승 소설가

● 좌장
△권희돈 문학평론가·청주대 명예교수·문학테라피스트

● 때·10월 20일(목) 오후 4시 30분
● 곳·충북 진천 포석 조명희문학관 세미나실
● 정리·박장미 동양일보 기자
● 사진·최지현 〃 사진부 기자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양승국 교수님께서 김우진과 조명희의 교우관계, 문학적 영향관계를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둘의 관계, 헤어지는 과정을 보며 이산의 아픔 뿐만 아닌 그 슬픔이 친구관계에도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박진숙 교수님은 조명희 선생을 자생적 민족주의 내지는 애국자로 표현했습니다. 사회주의 애국자, 리얼리즘을 창작기법으로 삼은 작가로 발표해 주셨습니다. 이제 토론에 들어가겠습니다. 토론자께서는 순서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질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장
“박 교수님께서는 조명희는 더 이상 사회주의자나 사회주의 문학자가 아닌 조선 민족주의 문학자라는 것을 전제로 하셨습니다. 이 발표문의 요지는 조명희가 사회주의자가 아니고 조선 민족주의 문학자이며 그 근거를 대략 다섯가지 정도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조명희는 일제의 검열로 시대비판적 발언을 할 수 없어 러시아로 망명했는데 거기서도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고 검열로 만신창이가 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조명희가 사회주의자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주의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포석은 소설 ‘낙동강’의 주인공 박성운을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전환시켰음에도 왜 사회주의자로 나아가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은 것은 다시 조선으로 귀환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이유로 사회주의 문학가는 아니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이기영 선생의 글을 인용해 사회주의 투사들의 고난과 희생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인도주의적 태도에 근거해 이 작품은 혁명적 정열과 미래를 확신하는 낭만주의적 지향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문학자가 아닌 민족주의 문학자라고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관제문학으로 전락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말씀하신 것인지, 원래의 것을 말씀하신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 작품에 낭만주의적 지향이 있다면 조명희 선생이 사회주의적 문학가라는 것의 반증이 됩니다. 네 번째는 3.1운동의 배경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서 찾고 계십니다. 저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들의 울분이 쌓이자 그것이 응축돼 원인이 됐다는 그 발상이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3.1운동에 대해 역사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야기 하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2년여에 걸쳐 포석 평전을 동양일보에 연재했습니다. 그때 나름대로 조사 해본 바 ‘일제 자료에 나타난 3.1운동 상황’이라는 자료가 있습니다. 3월15일 진천에서 3.1운동과 관련한 최초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보통학교 학생의 시위기도가 발각된 것입니다. 포석과 관련된 대다수의 사람들은 포석 선생이 3개월동안 옥고를 치렀다는 것을 일관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로 이 시기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석선생이 만세시위를 기도했던 자료와 옥고를 치렀던 자료를 찾을 수 있다면 상당히 좋겠지만 거의 희박하지 않나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료로 반증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섯 번째 이명재 교수의 포석 평전을 인용해 포석이 사회주의 문학자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평전을 쓰며 느꼈습니다만 객관적 자료나 사실에 근거해 써야 하지만 온전히 그렇게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주관적 판단과 사실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것을 참고해 주길 바랍니다. 박 교수님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포석의 아이덴티티는 사회주의 문학가로서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포석이 소련작가연맹 회원으로 상당한 기간 활동했고 러시아에서 썼던 작품 중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물평가는 그분의 전 생애를 거쳐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 문학가라는 부분도 결국 우리가 수용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진숙 충북대 교수
“앞에 말씀드렸듯 저는 포석이 사회주의 문학가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며 사회주의에 근거해 작품을 썼다기 보다는 조명희 선생이 일제 강점기 현실의 탈출구로 민족주의 사고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낙동강을 학생들에게 읽게 하면 왜 민족주의자인지 사회주의자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는 그의 생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은 하지만  실제로 그의 소설에는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겠다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낙동강’이나 카프작품도 귀속시키는 작업이 아닌 그 작품만 보며 다른 평가를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존에 봐 왔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닌 끝내는 민족주의자였던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평전을 인용했기 때문에 당연히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제 의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과거의 평가이고 그 평가가 틀리진 않았지만 실제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한 작품이 우리문학에 몇 편이 있을까 따져본다면 다른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작품에서 나타내고자 했던 생각은 무엇일까 하는 점을 깊이 있게 봐야겠다는 의도로 이 글을 썼습니다.”
▷오만환 진천문인협회장
“창작희곡 ‘김영일의 사’가 김우진의 만남에 연유한다는 것, 편지글과 희극 ‘산돼지’ 등을 통해 두 사람의 우정과 치열한 문학정신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양 교수님의 글에서 포석의 시에 대한 김우진이 쓴 평가가 칭찬만 있어 그것이 개인적인 것에 연유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봄 잔디밭 위에’라는 작품의 문학성은 시인인 제가 봤을 때에도 매우 탁월합니다. 문학평론가로서 ‘봄 잔디밭 위에’가 가진 문학성 대해 말씀해 주길 바랍니다.
김우진의 비평에 주목하며 ‘봄 잔디밭 위에’를 읽어봤습니다. 제가 본 견해로는 박탈의식 속 희망이 합쳐진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교수님의 견해도 듣고 싶습니다. 박 교수님께 백석의 시가 떠오른 이유를 묻고 싶었는데 발표문에 잘 설명돼 있었습니다. 포석의 동시적 요소, 향토성 등이 백석에도 있었고 포석의 삶과 문학이 민족주의자적인 것을 잃지 않았다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상실감이나 저항의식은 있지만 비극적 자유지향성, 낭만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포석 문학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교수님께도 포석의 시에 대한 문학적인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양승국 서울대 교수
“발표가 시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루진 않았습니다. 김우진이 왜 다른 시들보다 이 시를 높이 평가했는가에 대한 부분과 조명희에 대한 김우진의 평가는 다른 시인들보다 개인적이었습니다. 당시 김우진은 비평가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글은 지금 봐도 수준 높고 아주 객관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주 객관적이었던 냉정한 비판가가 조명희에게 유독 사적인 감상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자연과의 합일 등이 김우진과 연계돼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김우진은 4살 때 친어머니를 잃었고 다른 어머니와 살아온 가족사가 있습니다. 김우진도 시를 많이 썼는데 시의 주제가 조명희의 시집과 내용이 유사합니다. 작품을 평가하는데 여러 기준이 있지만 나름대로 조명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우진의 개인적 취향과도 잘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박진숙 충북대 교수
“국문학은 시, 소설, 희곡으로 세분화 되어있습니다. 답변을 면하려는 변명은 아니지만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감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사 속 ‘봄잔디 밭 위에’를 평가하기에는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 ‘어머니’라는 소재가 나옵니다. 시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가장 중요하고 원천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문학작품은 텍스트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른 텍스트에 비해 큰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불확정성입니다. 그러한 특징 때문에 문학작품 특징 자체는 독자의 수만큼 해석의 갈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명희의 작품도 해석자 입장에서 보면 끊임없는 해석이 나올 것입니다.”

▷김주희 문학평론가
“저는 양 교수님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김우진과 조명희는 당시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엘리트 청년, 말하자면 특혜를 입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서 살아야할 곳을 고민하며 연극을 하고, 우정을 나누고, 교류합니다. 양 교수님의 발표는 조명희 선생을 박제화 시키는 작업이 아닌 그도 우리와 똑같은 청년이었고 이상을 품었던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게한 연구였습니다. 조명희 선생은 김우진이 죽은 뒤 희곡을 많이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문학적 우정이 조명희 선생이 후일 문학장르를 선택하는데 영향을 주지 않았나 교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양승국 서울대 교수
“당시에는 시와 소설, 희곡을 모두 쓰는 작가가 많이 없었습니다. 이 당시 일본에 건너가 공부한 사람들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드문 수준의 엘리트였습니다. 일본에 가서 고생을 했던 것은 맞지만 극예술연구회와 같은 모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조선에 돌아와 조선 문학의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거의 이 시점에 건너간 사람들 중 처음부터 예술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들과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 중 예술 모임들을 만들었고 각자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맡아서 했을 것입니다. 앞서 나온 동우회 순회극단의 무대감독이 바로 김우진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김우진이 맡아서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해 공연을 했는데 굉장히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우진으로서는 조명희를 거의 신급으로 여기지 않았나 추정해봅니다. 조명희의 ‘파사’라는 희곡도 시적입니다. 그 뒤에 ‘낙동강’이라는 작품도 나오고 그렇게 되자 김우진은 그런 분야에 그의 재능을 쓰도록 권유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정연승 소설가
“저는 박 교수님의 글 중 ‘한일합방’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을 ‘일제강점기 전후’ 정도로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포석 조명희 선생의 작가적 성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작가로 인식하고 있어 어느정도 일반 독자들은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박 교수님이 포석 선생이 리얼리즘 문학자, 민족주의 문학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 일반 독자들이 포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백석 시 두편을 인용해 러시아행을 선택한 포석의 내면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포석이 러시아행을 결정하게 된 데 백석의 시가 어떠한 연관관계가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는 ‘낙동강’의 주인공 박성운을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전환시켰지만 왜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했는지 소설 속 형상화 되지 않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소설가로써 작법성과 관련해 질문드립니다. 소설 특성상 작가는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줄 뿐 가르치거나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실천성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작법성의 문제지 사고나 구성이 미약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진숙 충북대 교수
“사실 저도 ‘한일합방’이라는 용어를 써도 될지 사학 전공자에게 문의해 봤습니다. 정확하게는 ‘한일병탄’이 맞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일병탄이 널리 쓰이지 않아 합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연구자로서 옳은 태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석시를 언급할 때는 시의 감상의 한 부분으로 써 놓은 것이어서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질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명희 선생이 높고 큰 정신을 가졌으되 현실에서 시행할 수 없었던 그 괴리를 느꼈던 내면이 백석시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낙동강에서 전환부분은 러시아로 가기 전 조명희 선생님의 결단이 반영된 부분이라고 생각입니다. 하나의 선언으로 보는 것이 다음 논의로 이어가는데 적절하다고 판단해 그렇게 서술했습니다. 다른 분들이 보기에는 다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사회주의자로 나아가야겠다는 포석의 결단이 보였습니다.”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장
“양 교수님께서는 ‘김영일의 사’에 대해 무명작가의 데뷔작 공연이었음에도 이 한 작품으로 문단에 족적 남겼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김영일의 사’가 최초의 창작 희곡이라는 부분을 염두한 줄 알았는데 아까 최초의 창작희곡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최초는 무엇이고 이러한 의견이 사견인지 학계의 공통된 의견인지 듣고 싶습니다.”

▷양승국 서울대 교수
“조명희의 ‘김영일의 사’는 최초의 창작희곡이 아닙니다. 1910년대에 이광수의 ‘규한’이라는 작품, 윤백남의 1919년대 작품 등 1910년대 작품들이 몇 작품 있습니다만 공연된 희곡 작품으로는 ‘김영일의 사’가 최초입니다. 즉 대본을 확인할 수 있는 공연된 최초의 창작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최초의 근대정신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광수의 작품은 근대정신이 약합니다. 최초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 근대정신에 집중해야 합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최초의 근대극이 무엇인지 합의되지 않았습니다.”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오늘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양 교수님의 발제를 보면 김우진과 조명희 두분의 사이가 금란지교였던 것 같습니다. 이 관계를 통해 비교문학적 연구의 길을 틀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박 교수님의 발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최인훈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아주 혜안있는 작가인데 그가 1990년대에 조명희를 호출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조명희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갖고 있느냐, 자생적 애국주의자냐를 규명한다면 규정하는 순간 조명희의 생명은 멈춘다고 생각합니다.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구자들에게는 연구되고 많은 독자들에게는 그의 작품들이 향유돼야 합니다. 이것이 문학 대선배인 조명희를 바르게 기리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을 기리는 일은 오늘부터 다시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포석 조명희 심포지엄을 마치겠습니다. 수고 많이 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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