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무심으로 산 활상개신의 지민사업가

 

동양포럼은 학교법인 청석학원의 설립자 청암 김원근(淸巖 金元根·1888~1965)선생·석정 김영근선생(錫定 金永根·1890~1976) 형제 가운데 석정 선생을 ‘그리운 청주인’ 시리즈에서 조명한다. 이를 위해 지난 2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용환 충북대 교수,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좌담회의 내용을 요약·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지난 6월 2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그리운 청주인-석정 김영근 선생’을 주제로 한 좌담회가 열렸다. (왼쪽부터)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용환 충북대 교수,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저는 지난 30년 동안 주로 나라 밖에서 제 고장 ‘청주의 얼’이라는 것을 무심천으로 상징되는 무심(無心)과 개신동으로 상징되는 개신(開新)으로 표방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제 나름으로 익힌 학문적 성격을 ‘개신개래(開新開來)=학문의 새로운 차원·지평·세계를 넓힘으로써 사람과 겨레, 나라 그리고 온 누리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데 이바지함)’의 인문학으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그와 같은 청주의 얼을 삶속에서 나타내고 보여주었던 분들이 늘 그리웠습니다. 그렇다고 어찌 그 대상이 학문의 세계에만 국한되겠습니까? 제가 김영근 선생에 대하여 읽고, 듣고, 느끼고, 깨달았던 것을 제 나름으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삼무심(三無心=무사심(無私心)·무사심(無邪心)·무교심(無驕心)을 바탕으로 한 활상개신(活商開新=올바른 상인정신을 일깨움으로써 사람과 고장과 겨레와 나라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데 크게 이바지함)의 상인도(商人道)를 일생동안 실천궁행했던 이 고장의 진정한 어른으로 기억하고, 그 올곧은 삶과 뜻을 그리고 기리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럼 먼저 김영근 선생을 잘 아시는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이 발제해 주었으면 합니다.”

 

청석학원의 설립자 석정 김영근 선생.

▷유성종 동양포럼위원장 “석정 김영근 선생을 발제할 수 있는 인연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청석학원으로 개명하기 전 대성학원시절에 대성학원에서 배우고, 자라고, 교사로 근무했으며 청주상업고등학교 교사시절에 최초의 학원사(學園史)인 ‘대성학원40년사’를 책임 편찬하였고 대성학원 기획실을 만들었으며 1965년 청암 김원근 선생께서 서거하셨을 때는 ‘청주시민 사회장’을 기획·지휘한 자입니다. 제 나이로 보아 아마도 저만큼 대성학원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고 또한 공정하게 대성학원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연치라고 생각하여 이 구실을 맡았습니다. 지금 청석학원이라고 불리는 대성학원은 첫째, 한국의 대표적인 사학(私學)입니다. 한국의 사립학교가 수없이 많지만 청주의 대성학원처럼 100% 사재(私財)를 들여 설립한 예는 드뭅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7개 학교를 유지하고 있는 규모도 많지는 않습니다. 둘째, 대성학원은 설립에서부터 깨끗하게 운영되어 왔습니다. 한때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우골탑’이라는 악명을 들었고 학교 늘리는 일을 백안시하였습니다만 대성학원은 그런 부정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저는 김원근·영근 형제분의 학원 운영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셋째,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석정 선생은 청주상업학교(청주상업고등학교→청주대성고등학교)와 청주상과대학(청주대학교)의 설립인가서의 명의자입니다. 곧 그분의 이름으로 설립인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분이 모든 공을 모두 형님께 돌리고 평생을 숨어서 말 한마디 없이 살았습니다. 한운사 선생의 ‘위대한 평범’에서처럼 석정선생의 ‘아, 내가 뭘 했다고 그러나?’라는 한 마디로 온갖 치사를 물리친 침묵을 ‘위대한 침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동기간 우애와 겸손에서만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겸허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석정 선생만큼 사진 한 장조차 남기지 않았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감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학원의 어떤 행사초청을 받아도 형님과 나란히 앉는 일조차 거부했습니다. 저는 석정선생이야말로 우리 시대에서 드문 대표적인 의리의 실천자라고 봅니다. 넷째, 석정선생의 성공은 현대어로 ‘재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오늘날 ‘재벌의 청빈’이라는 말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김영근 선생은 ‘청빈’을 실천한 재벌이었습니다. 그분은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무명 바지저고리에 고무신을 신은 모습이었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재벌급 기업인으로서 참 드문 예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영근 선생을 ‘의인(義人)’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 석정선생의 말 없는 그 모습은 한국 최고의 선비상, 스승상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훌륭한 모습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선비와 스승됨을 후세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더구나 왜곡해서는 안 되기에 오늘 석정선생을 기리는 것입니다. 그토록 깨끗하고 훌륭하게 사신 분을 말이 없다는 이유로 망각하거나 곡해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사실대로 전하고 기릴 것은 기리고, 그리워할 것은 그리워해야 하는데, 후대에 갈수록 장난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와전 왜곡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김용환 충북대 교수 “석정 김영근(錫定 金永根·1890~1976)선생은 경주 출생으로 여섯 살에 청주 운천동으로 이주했습니다. 이후 형 청암 김원근(淸巖 金元根·1888~1965)선생과 함께 장사를 하며 ‘김원근 상회’를 창업하고 일본 오사카와 교역을 했습니다. 1906년의 대홍수로 상업자본의 유실을 겪으면서도 수재민 구제사업에 힘썼고 1911년에 김원근 상회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이후 형제는 조치원과 청주일대에 1만5000석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 부상하게 됩니다. 석정 선생은 원산에서 기반을 닦아 1926년 해산물 창고 ‘원산상업주식회사’, 간유·어유 제조회사인 ‘원산간유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1942년 원산 주태경 여사를 움직여 이화여전(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 10만원을 희사케 함으로써 일제강점기의 이화여전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1970년 석정선생은 교육부분 본상을 수상하고 정부로부터 국민헌장 모란장을 받았습니다. 1974년에는 김해장학회를 설립하고 대성학원 창립50주년 기념사업으로 설립자 정기간행위원회에서 ‘위대한 평범’을 발간했지만 2년 후인 1976년 서거하셨습니다. 1981년 청주대는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그 이듬해 청대교정에 석정 동상이 건립되었습니다. 1991년에는 학원명의를 ‘대성학원’에서 ‘청석학원’으로 변경했습니다. ‘위대한 평범’에 나타난 석정선생에 관한 일화를 살펴보겠습니다. 대성학원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오천석 전 문교부장관은, 석정선생이 학원설립자로서 하객의 축복과 감사를 받는 자리에 나오지 않고, 시골 가게 앞의 나무의자에 앉아 기름을 팔고 있던 석정선생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남준 전 한국은행기획부장은 공산정권이 북한에 들어오자 재산을 모두 버리고 남쪽으로 건너온 일이나, 돈 없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쾌척한 일, 원산제일보통하교, 원산상업학교, 원산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액을 기부한 일 등을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또 청주상업학교에 피땀 흘려 모은 25만원을 형님이름으로 기부하고 낙성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내가 가면 형님하구 같이 단상에 올라가 앉으랄 것이 아녀? 나는 그러고 싶지 않거든. 내가 같이 올라가면 아버지 같이 모시던 형님의 빛이 덜날 것이고. 형님이 거북해 하실 거구 말이여. 그러니까 안 가는 게 상책이라 말이여.”라고 했던 일화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평생 뼈 빠지게 벌어서 ‘교육구국’의 일념에 바친 고난의 길이 바로 석정선생의 실존이자 청주대의 ‘실천봉공’이라는 교훈에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는 셈입니다. 돈에 집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공산정권이 밀려오자 원산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남쪽으로 건너오듯 돈에 집착하지 않는 ‘무심’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청주의 ‘무심’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불쌍한 사람을 항상 도왔던 진정한 ‘보살’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제가 김영근 선생에 대해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무일푼, 무학으로 장사를 시작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지만그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두 형제는 서로 도와가며 대성학원을 만들었습니다. 김원근 선생은 앞에서 끌고 김영근 선생은 뒤에서 미는 역할을 도맡아했습니다. 큰 학원의 설립자임에도 아무 치장도 없는 단칸방에서 생활했다는 것은 그분의 청빈을 잘 보여주는 일 같습니다. 자기 개인을 위해 돈쓰는 것은 절약했지만 학교를 위한 일에는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사람들이 강제에 못 이기거나 자진해서 친일행위를 했는데, 그분은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사바로잡기라는 각도에서 보아도 석정 김영근 선생은 진정한 애국상인이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석정 선생은 상재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성, 윤리성, 시대정신을 꿰뚫는 안목이 굉장했던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석정선생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탁월한 상술과 고도의 도덕심을 겸비한 ‘수기상인(修己商人)’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영근 선생이 애용하던 나무의자.

▷김 주간 “일본을 거점으로 하고 세계적인 규모의 교토포럼을 통해서 공공(公共)하는 철학대화운동을 전개할 때에, 여러 번 격론을 벌였던 문제 중의 하나가 ‘관인(官人=관료나 정치인)’과 ‘상인(商人)’과 학자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인간·사회·국가의 공공화(公共化)에 이바지한다고 보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이른바 ‘사무라이(武士)’와 ‘아킨도(商人)’ 지식인의 비교라는 문제로 열띤 논쟁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과 글래스고대학, 중국 상해에 있는 복단대학과 국립대만대학, 그리고 일본의 도쿄대학과 교토대학에 있었던 열띤 토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의견대립이 심했습니다. 그렇지만 학자나 지식인은 소위 공공성의 개념논쟁에 열심인데 비해서 관인은 국가 중심적 공공성(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은 ‘公’이지 ‘公共’이 아니라고 생각함)에 치중하고, 상인은 사회적 공공성에 기여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 하는 데서 잠정적인 공통인식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예를 들면 니시카와 죠겐(西川如見·1648~1724)·이시다 바이칸(石田梅岩·1685~1744)·카이호 세이류(海保靑陵·1755~1817)와 같은 쟁쟁한 상인학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전통적인 ‘사농공상(士農工商)’적 상인멸시의 관인 중심적 사회풍조를 신랄하게 공격 비판하고, 그 근본적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거기서 건전한 상인도(商人道) 또는 상도(商道)가 정립되었고 근현대 일본의 기업윤리 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며 이런 점은 영국이나 중국에서도, 그리고 미국에서도 널리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착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있어도 제대로 된 상도 또는 상인도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얼마 뒤에 한류드라마 ‘상도(商道)’가 일본·홍콩·대만·싱가포르 등지를 중심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어 비록 픽션(虛構)이지만 한국 상도를 거론하게 되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그려진 임상옥이라는 주인공의 보살상인적 인간상에 크게 감동받았다는 것을 직접 보았고 대화도 여러 번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요 TV드라마를 통해 전해진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실재인물에 관한 실화가 아니지 않느냐는 예리한 반문을 받고 저는 이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역사적 사실 규명보다도 사회적 상상력이 호소력에서 더 클 수 있다는 변호론을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서 석정 김영근 선생의 삶과 사람됨과 투철한 상인정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도구국(商道救國)의 생활철학=상심실학(商心實學)이야말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고도의 공공실천을 기반으로 한 생명존중의 사인도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어, 늦게나마 청주얼을 다시 체감하는 것입니다. 청주얼은 우리에게 각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만 요란하고 실속이 없는 정치지도자론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 사회를 밝게 하며, 사람과 사람이, 나라와 나라가, 그래서 온 누리를 더 행복하게 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하는 진정한 상인지도자와 상도실천가가 절실하게 기다려진다는 것입니다. 석정선생의 삶과 행적과 투철한 상도실천을 제대로 연구하고 정리해 놓으면 청주발 세계적인 상인철학과 상인지도자론이 가꾸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청주학의 핵심주제로서 뜻있고 능력을 갖춘 인사들이 연구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 위원장  “김 주간이 김영근 선생을 한국을 대표하는 상도의 표본이라고 간파한 그 상도에 관련한 기초자료를 몇 가지 더 알려드림으로써 김 주간의 추론에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청주상업학교의 초창기에, 강당에는 ‘사혼상자(士魂商才)’라는 여섯 자 액자가 걸려 있었고, 수신교과의 4·5학년 과목은 ‘상업도덕’이었습니다. ‘사혼상재는 선비정신으로 상업하는 인재’를 기른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대성학원에서 쓴 ‘실학성재(實學成才)’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학교를 설립한 목적은 자강불식(自彊不息)?민족역량의 충실입니다. 그분의 교육하고자 했던 뜻은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빼앗긴 나라, 가난한 겨레의 현실을 식민지배하는 일본 못지않게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상공(商工)의 기술교육에 집념하고, 관권을 거부하여 끝끝내 사립학교?전액 사재설립의 학교와 그 독립적인 운영을 고집하였던 것입니다. 오천석 문교부장관의 회고담은 그 백미(白眉)입니다. 군정청 문교부차장 시절의 오 박사, ‘하루는 농사꾼 같은 노인이 문교부로 나를 찾아왔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그는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엉뚱한 계획을 피력하였다.……교육 사업을 위하여서는 백만금을 아끼지 않는 그였지만, 대학설립을 인가해 준 나에게는 고작해서 15원짜리 냉면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오천석박사가 문교부장관이 되어서는 지나는 길에 조치원으로 그를 찾아갔더니, 감사하다고 가을이 되자 손수 지은 쌀 한가마를 서울로 부치어서 받아먹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면 석정선생의 어떤 행적이 상업의 도리이고 도의이고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분은 학문으로 배우지는 않았어도 유랑소년의 삶 속에서 근면하고 검소하고 상업하고 축적하여 스스로 터득한 슬기와 방법으로, 산물유통(産物流通)=경국제세(經國濟世)이고, 만족교환(滿足交換)=만민행복(萬民幸福)이고, 그래서 사혼상재(士魂商才)=상업도덕(商業道德)을 깨닫고, 실천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직하였고 약속을 지켰으며, 주고받는 신용관계가 철석같아서 업계에서 단연 돋보였고, 일호의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화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원산에 김모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하여 신용을 잃고, 자금줄이 끊겨서 두문불출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불쑥 석정선생이 들어서며, ‘아 자네, 뭐하고 있는 거여. 은행에서 때가 되었는데도 돈 안 갖다 쓴다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던데……’하고 그냥 나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김모씨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은행으로 달려가 융자를 청하였더니, 은행은 친절하게도 담보도 없이 요구하는 액수를 선뜻 내주었습니다. 그는 실패를 거울삼아 열심히 일했고, 2년 뒤에는 재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회복기간이 지나서, 감사의 뜻으로 은행원들을 초청하여 술상을 잘 차려 대접한 뒤에, ‘나는 다시는 은행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습니다. ‘내가 2년 전에 돈을 꿔갈 때 나는 알거지였는데, 그런 나에게 돈을 주는 무모(無謀)와 신용도를 생각하지 않고 융자해 주는 은행은 언제 망할 지도 모르므로 그런 은행에 어떻게 돈을 맡기겠느냐?’ 하면서. 그러자 지점장이 무릎을 치며 껄껄 웃었습니다. ‘아직도 모릅니까?’ 김모씨가 ‘무엇을 말이오?’ 하니, ‘아무것도 없는 이에게 돈을 꿔주는 은행은 없습니다. 어느 날 김영근 사장님이 찾아오셔서, 내가 액면 없는 수표를 끊어 줄 터이니 김 사장에게 돈을 꾸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수표를 믿고 융자해 드린 것이지, 김 사장에게 그냥 내드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하나의 일화는 나태경 여사의 후원금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오늘의 이화여자대학교)가 일제말의 자금난을 해소하게 된 비화의 주인공으로, 석정선생은 교장인 김활란 박사에게 나태경 여사의 흉상을 교정에 세우도록 요구했고, 그 동상이 6.25 동란 때에 인민군의 횡포로 파괴되었음을 안 선생이 그것의 재건을 김옥길 총장에게 요구해 김 총장이 석정 선생을 찾아가 사죄하고 이내 그 동상을 복구하였다고 술회하였는데 이렇듯 그는 약속을 존중하였습니다. 또 다른 일화는 어릴 적에 잠깐 동안 돌봐준 주모(酒母)의 실전된 산소를 찾아서, 명당을 잡아 묘소를 써준 미담입니다. 조그마한 은혜, 어떤 인연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보답하였습니다. 그분의 겸허(謙虛)는 남달랐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모든 공덕을 말한 일이 없습니다. 모든 공적을 형한테 돌리고 자신을 낮추고 말없이 살았습니다. 어떤 취재 기자와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친수하는 5.16 민족상 시상식에도 안 나갔고, 국가 훈장도 직접 나가 받지 않았습니다. 학원본부에서 기록으로 남길 사진을 찍는 일도 거절했습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나?’고 하면서 말입니다. 성공한 뒤에 가졌다고 교만하지 않았고, 일상생활에서 가정생활에서조차도 흠결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처신을 조심하여 평생을 일관하였습니다. 말년에 조치원에 은거하여 단칸방에서 기거하며 농사짓고, 가로수인 플라타너스 잎을 모아다 군불 때며, 낮에는 손수 만든 나무의자에 앉아 됫병의 석유를 팔던 일에서 성자(聖者)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조그마한 일조차도 하나의 사회적 체제(social system)로 사신 분이니까요. 그리고 그분이 번 돈을 쓴 방법이 또한 남다릅니다. 민족자본의 축적을 염두에 두고 일본과 대등한 경제력을 이루고 싶다고 입지하였으며 그 과실을 몽땅 교육에 투자하여 일제강점기에 민족계몽을 이끌게 했습니다. 광복 후에는 국력의 신장을 기원(冀願)했다는 특성입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중·고등학교와 대학까지 7개교를 설립 유지 운영하였으되 전액 사재로 하였고, 영리를 위하여 학교를 확장한 일이 없습니다. 또한 교주(校主)라는 개념이 강한 우리나라 사립학교 체제에서 석정선생은 학교에 간섭한 일도 없고, 교장을 부른 일도 학교를 방문한 적도 없습니다. 온전히 교육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지원하는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또한 형우제공(兄友弟恭)한 형제간의 우애입니다. 그가 평생 동안 한결같이 믿고 실천한 것은 형제간의 우애?형의 어려움을 언제나 대신 맡고, 형의 제안에 무조건 순종하고, 함께한 모든 일의 공덕을 형에게 돌려 형제가 공식행사의 자리에 함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정한 이 원칙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투철하고 독특하여 학원설립의 전 과정에서 그렇게 기여하고서도 백가지의 공을 모두 형님에게 돌리고 뒤로 물러나 숨어 살았다는 일은 참으로 일반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의리였습니다. 그분의 이 침묵은 겸손과 자애의 선비정신의 최고경지라 하겠는데 ‘내가 뭘 했다고 그러나?’는 아무나 실천할 수 있는 철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석정 김영근 선생은 참배움(實學)의 선사(先師)이고, 참마음(實心)의 성자(聖者)라고 하겠습니다.”

▷김 주간 “저는 유성종 위원장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면서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 석정선생의 삶과 사람됨과 거기서 우러나오는 깊은 맛을 요약해서 말씀드리면,?어디까지나 저 자신의 개인적인 체감입니다만?(상업봉사 곧 행복 : 오직 상업 한길을 가면서, 거기서 번 돈을 값지게 씀으로써 이웃과 겨레와 나라에 봉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을 올곧게 티 없이 살았고, 그것으로 삶을 마치신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외람된 말입니다만, 저는 (학업봉사 곧 행복 : 오직 학문의 길 하나로 걸어오면서, 다른 데 눈 팔지 않고 그 길을 통해서만 무엇인가 작은 봉사라도 할 수 있으면 그것이 곧 행복)이 아니냐고 스스로를 다짐하면서 살아왔는데, 여기에 석정선생을 지민사업가(뜻을 가진 백성으로 참다운 상업의 도를 실천하여 사람과 나라와 위하여 봉사하는 기업가)요,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낮추어 그 업적을 감추고 숨어산 어른이니, 참으로 큰 스승이셨다고 새밝힘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우리나라에 시민운동가는 많아도 이러한 지민사업가는 드문데, 석정선생을 그런 분으로 우리가 기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멀리 아주 멀리 무엇인가 제 넋과 얼이 그리고 기리는 것이 있을까 무던히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오래간만에 청주에 돌아와서, 가까이 아주 가까운 곳에 제 넋과 얼이 그리고 기리는 것이, 그립고 기리는 분들이 계셨구나 하는 아주 값진 깨달음이 계속되는 날들을 지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석정선생에 대해서 열심히 살펴보았고 생각해본 보람이 컸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정리·사진 박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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