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마팻(마포삼열 · 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 1864~1939).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선교사들의 초대모임에서의 인사말

미즈노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오랫동안 조선에 주재하시면서,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시느라고 불철주야로 노력하시고 있는 분들이 많은 줄 압니다. 마팻씨(마포삼열 · 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 1864~1939)와 같으신 분은 20년 이상이나 이곳에서 수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20년 전이라고 하면 조선은 아직 미개한 상태였고 근대적 문화나 정치도 시행되지 않았고, 법률 규칙도 불완전했을 뿐만 아니라, 신뢰할만한 재판소도 경찰력도 없어 국민의 생명이나 재산에 대해 아무런 보호가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철도라고는 경성 인천 간을 잇는 철도 하나 이외에는 없었고, 도로는 중국 사절을 맞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이외에는 없었으며, 도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의주에서 경성까지를 연결하는 노선 하나를 제외하면 전혀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은행 또한 없었고, 화폐제도도 없었으며, 학교라고는 구식 서당뿐으로 근대식 교육기관은 한 곳도 없었으며, 더 더욱 병원이나 구급기관과 같은 사회시설은 전혀 없었습니다.

수인(囚人)은 개 돼지와 똑같이 취급되었고, 민중의 권익 행복은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산림은 황폐했고, 농업과 공업은 원시적 상태였으며, 기근은 매년마다 찾아와 국민들이 기아에 허덕였으나 정부는 전혀 이를 돌보지 않았고, 의료 위생시설에 대한 관념이 없어 시가지의 불결함은 차마 눈을 뜨고 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듯 불편하고 위험한 상태는 오늘날은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마팻씨를 비롯한 다른 모든 선교사들은 이렇게 불편하고 위험한 환경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이곳에 오셔서 조선 민중을 위해 기꺼이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또한 친구가 되어 천명(天命)의 직무에 온 힘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이러한 용기와 희생적 정신에 대해 저는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조선 문화의 향상이야말로 여러분들의 공적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표현은 결코 아첨의 말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임무의 중대함과 고상함을 마음으로부터 깊이 느끼며, 이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노고에도 불구하고 지금 저는 여러분들에게 좀 더 욕심을 부려 부탁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솔직하고 간단하게 두 가지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여러분들께서 동정을 가지고 일본을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육사업에 관계하고 있는 제군들께 이를 요구합니다.

저는 선교사는 조선 아동을 교육할 교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자라고 불평하는 일본인들의 말을 여러 차례에 걸쳐 자주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선교사들은 일본의 국민교육주의를 준수하지 않을뿐더러, 일본 관헌에 협력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무자격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종교가는 정치에 관계하지 않는다.’는 말이 선교사들의 금언(金言)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합당한 의견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금언의 해석과 적용이 바르게 행해지고 있는지 아닌지가 의문입니다. 불평분자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선교사란 자신이 거주하는 나라의 국민의 국적이 어디이든 관계없이 그 나라 아동의 국민화에 대해 관헌과 협력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건대, 종교는 초국가적인 것이어서 국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진리이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종교가라 하더라도 일본 영토에서 일본 신민의 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이상, 그 학생의 국적에 유의해야 할 것이고, 일본의 국민교육주의에 따라 그 자제를 교육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본관헌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라고 생각됩니다. 만일 이것이 종교가의 본분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일본국은 어린 일본인 2세의 교육을 선교사들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중대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더욱이 어떤 비평가의 말에 의하면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 중에는 조선이 일본의 일부이고, 조선인이 일본의 신민이라는 사실마저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종교는 정치와 무관하다.’는 구실 하에 조선에서의 일본인의 주권을 무시하는 자 조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가 있다는 것은 선교사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부족 때문이고, 자신의 위치를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에 순응할 수가 없어서 초래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이 때문에 선교사 여러분들은 일본을 잘 알고 일본인의 국민사상, 일본의 제도·관습 등을 잘 이해한 후, 관헌과 협력하여 조선인 자제를 일본 법령 하에서 교육해야 할 것이고, 또 신민으로서의 조선인이 일본인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상호간에 이익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둘째 요구는 제군들께서 우리들에게 좀 더 친밀하고, 솔직하게 대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제군들과 우리들은 방향은 다르지만,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상호간에 잘 협력하여 어떻게 하면 조선인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좀 더 친밀하게 근접하여 공동작업을 추진할 수 있을지를 모색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작년에 연합회의에서 결의한 의견서를 받아, 이를 정독했습니다. 또한 많은 선교사 제군들로부터 사신도 받았습니다. 이를 받고 저는 깊은 경의를 표했습니다. 동시에 저는 외국 신문지에 게재된 우리 정부에 관한 불리한 보도-그것도 여태껏 누구에게서도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내용들이 조선에 있는 선교사로부터 발송되어 기사화 되었다는 보고를 읽고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중에서는 사실무근한 것도 있고, 상당한 오해에서 생긴 것도 있었습니다. 저는 결코 비평과 통신의 자유를 막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혹 여러분께서 우리들에게 호의와 친절을 가지고 계시다면, 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이전에 우리들에게 먼저 말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인 이상 과실이나 오해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주 접촉하여 의견을 교환하게 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과실이나 오해를 풀 수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작년에 제가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 어떤 양복점에서 “귀하께서 제가 만든 옷에 만족하시거든 귀하의 친구에게 선전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만일 만족스럽지 못하시다면, 그 때는 저에게 직접 말씀해 주십시오.”하는 광고문을 보았습니다. 지금 제가 제군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은 이 재봉사의 말과 거의 동일합니다.

우리들의 시정에 대한 비평이나 비난에 대해 제군들에게 한 마디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조선정치에 관해 선언하는 것이 항상 선언으로 끝날 뿐, 거의 실행은 되지 않는 다고 떠들어대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비평이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물론 우리가 계획했던 일을 하루만에 실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취임해 온지 이제 겨우 9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선언했던 모든 것을 실행에 옮겼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총독부 관제개정과 시정 개혁이후 우리들은 헌병제도를 폐지했고, 경찰 행정에 수많은 개선을 하지 않았습니까?

조선 관리와 일본 관리의 봉급에 있어서 차별대우가 폐지되었지 않습니까?

포교규칙이 쉽고, 편리하게 바뀌어 종교단체를 법인으로 하는 길이 열리지 않았던가요? 종교학교에서 성경 사용 기간이 영구히 연기되지 않았습니까?

또 관헌과 인민과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각지 대표자를 초대 소집했다는 것은 제군들이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언론집회에 대한 제한을 점차 완화했고, 현시점에서 세 종류의 언론신문의 발행을 허가하지 않았습니까?

조선인의 보통학교 수업년한을 연장했고, 교과목을 일본인과 똑같이 했습니다. 작년 여름 수해를 만나 수 천 만 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을 때 우리들이 조선인 빈민을 구제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조선인을 위한 우리들의 행동은 일찍이 제군들이 더 잘 알고 있는 바일 것입니다.

그런데 총독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평만 일삼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니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또한 앞으로 더 많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수많은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교육제도의 개선, 보통학교 증설, 의료·위생기관의 확장, 자선병원, 공의(公醫)의 증가, 지방자치제 실시 준비를 위한 도·부·면(道·府·面)의회의 신설 등이 있었습니다. 제군들이 동정심을 가지고 이들 상황의 현실을 지켜봐 주실 것과 이에 대해 협력해 주실 것을 간절히 희망합니다.

금후 제군들과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 이 모임에 와 주신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배일(排日) 선교사의 이해

미즈노 “평양에 사는 마팻선교사는 배일의 거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팻선교사가 귀국할 때 경성에 들렀기 때문에 그를 위해 특별히 만찬회를 총감 관저에서 열어 주었고, 마팻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선교사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때 그는 ‘우리들은 지금까지 총독부와 접촉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 총독이나 정무총감의 관저(官邸)에 출입해 본적도 없고 정무총감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것도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출석하려했는데, 실은 연미복(燕尾服)을 준비하지 않아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사실을 이마무라(今村) 통역관을 통해 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팻선교사가 귀국하는데 송별회를 겸하여 서로가 심금을 터놓고 이야기도 할 겸 마련한 자리인 만큼 복장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라고 설득하여 만찬회에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에는 수 십 명의 선교사들이 초대되었고,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외에도 미국이나 영국 등지에서 유람차 들러가는 선교사가 있을 때마다 총독이나 제가 항상 이들을 초대하여 숨김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 결과이었는지 점차 그들도 의사가 소통되기 시작하였고, 융화할 수 있게 되고, 오늘에 와서는 거의 전부가 총독부에 위탁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1921년 9월 21일로 기억되는데 경성에서 기독교 선교전도단 연합회(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의 주최 하에 연차회의가 열렸을 때 저에게도 그 회의에 출석해 줄 것을 희망해 왔기 때문에 기꺼이 이를 승낙했고, 그 회의에 출석하여 일장 연설도 했습니다. 과거 총독부 관리가 기독교 회합에 출석한 적은 없었습니다만, 저는 이 모임에 참석하여 그들과 접촉함으로써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회의석상에서 기탄없는 의견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그 연설의 대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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