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노동절 퍼레이드가 열린 혁명광장. 저멀리 체게바라 모습이 보이고 학생들의 깃발 군무에 이어 무빙워크 탄 듯 행렬이 밀려드는 순간이다.

(동양일보 김득진 기자) 쿠바 음식이 먹고 싶었는데 일본 식당으로 끌려간 게 화근이다. 쿠바 돌아온 걸 환영하는 자리였지만 낯선 데다 비싸기까지 한 음식에 짜증난 건지 위가 파업을 시작했고, 내색하진 못해도 일행과 헤어지기 바쁘게 소화제를 먹었다. 두 알이면 너끈하게 뚫리곤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밤새 속이 뒤틀렸다. 첫 단추를 잘못 꿰다보니 다음 일정에도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소화불량이 캐리어에 숨어 캠프까지 따라왔고, 속 부글거리는 며칠 동안 챙겨온 소화제가 다 떨어졌다. 하는 수없이 룸메이트 일본 학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소화제 가져온 거 있느냐고 물었더니 캐리어를 뒤져 정로환을 꺼내 보여줬다. 비슷한 것 같아도 정로환을 소화제라 부르는 건 약물 남용이라 보는 게 옳다. 그 뒤부터 유기농으로 꾸려진 레스토랑 식사를 더 오래 씹어가며 양도 줄였다. 배고픈 탓에 깊은 잠 이루기도 어려웠는데 기상나팔 소리 대신 들려오던 수탉 홰치는 소리며 관타나메라는 어찌나 시끄럽던지.

메이데이 전야제에 이어 술 마시며 논다고 시끌벅적하던 캠프, 조용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속 부글거리는 데다 소란까지 겹쳐 잔 것 같지 않은데도 떨판 찢긴 스피커는 눈치없이 모닝콜을 왕왕 쏟아냈다. 취침등 불빛에 시계를 들여다보니 세시 반이다. 저녁 먹고 곧바로 누워서인지 불편한 속이 도무지 나을 기미가 없다. 이른 새벽이어서 늘 지저귀던 새들마저 조용하고, 관타나메라 노래보다 먼저 깨우곤 하던 모기도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캠프. 문을 열어젖힌 관리인이 서두르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해 뜰 무렵 시작되는 퍼레이드에 입장하려면 늦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 말에 새벽 무렵에야 도미토리로 돌아왔던 대원들이 신기하게도 몸을 부스스 일으키는 게 아닌가. 그들보다 먼저 볼일을 봐야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바삐 침대를 벗어나 화장실로 갔다. 먼저 온 사람들이 길게 줄 선 화장실, 물 사정이 좋지 않아 볼일 보고도 뒤처리를 못했는지 냄새가 코며 눈을 찔러댔다. 코를 막고 볼일을 본 뒤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급히 도미토리로 돌아왔다. 레스토랑에 간단한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룸메이트가 전했지만 뒷일이 걱정스러워 망설였다. 먹기엔 조심스러워 마른 빵과 바나나 두 개를 가방에 넣어 배고플 걸 대비했다. 속이 거북하긴 해도 비상식량 챙기는 건 본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주차장으로 나서서 올라 탄 버스, 여덟 대가 순서 없이 출발했다. 경찰 오토바이 두 대 에스코트 받으며 혁명광장으로 달리는 버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모두들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있었지만 나 혼자 무거운 눈꺼풀을 껌벅거리면서도 잠에 쉬 빠져 들지 못했다. 한 동안 달리던 버스가 갓길에 멈춰 서고, 인솔자가 모두 내리라고 말했다. 잠에 취한 대원들은 버스가 고장 난 건지 목적지에 다 온 건지조차 묻지도 않고 좀비처럼 휘적휘적 인솔자를 뒤쫓았다. 맨 뒤에 앉은 나도 그들을 뒤따라 차에서 내렸다. 얇은 티셔츠를 입은 탓에 찬 공기 스며든 배가 갑자기 꾸륵거렸다. 통증이야 견뎌낼 수 있지만 혹시 화장실에 가야한다면 큰일이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휴지가 있나 확인한 뒤 쿠바의 화장실, 바뇨 표시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지만 어둠살이 걷히지 않은 시가지는 간판 글씨조차 보이지 않았다. 긴장이 더해지니 횡경막이며 복근이 힘을 합쳐 창자를 쥐어짰다. 일행과 떨어지게 된다면 곤란한 일이 많겠지만, 배탈 난 경우에는 그런 걱정 따윈 사치라고 보는 게 옳다. 나는 인적 드문 어두운 골목이 있나 눈 부릅뜨고 살폈다.

한 동안 골목을 더듬다가 육십 년 훌쩍 넘긴 화물차가 시선에 잡혀 달려갔고, 적재함 뒤편 어둠을 가리개 삼아 아슬아슬 고비를 넘겼다. 급한 볼일을 무사히 치른 안도감은 당해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다. 발등의 불을 끄고 나니 수만 군중 속에서 일행을 찾아낼 일이 막막했다. 혁명광장 출입이 허가된 아이디카드만 믿고서 오 미터 간격으로 줄지어선 군인들 사이로 태연한 척 걸어갔다. 무궁화 계급장을 단 군인이 그걸 가지고는 여기로 들어갈 수 없다면서 나를 가로 막았다. 그는 도로가 꺾이는 곳에 외따로 선 군인을 가리켰다. 한참 걸어가서 계급장을 보니 별 두 개짜리, 그 다음 길 안내를 맡은 군인은 별 세 개다. 퍼레이드 참관 안내를 별 세 개 군인이 맡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짝퉁별을 붙인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 모자와 견장을 거듭 살폈다. 고개 갸웃거리며 걸어 간 혁명의 탑 아래 스탠드에서 일행과 다시 만나 긴장이 풀리긴 했지만 혹시나 해서 간이 화장실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 그거나마 갖춰둔 걸 천만다행이라 여기면서.

팡파르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라울 카스트로며 국가 지도자들 소개가 짧게 이어졌다. 학생들의 깃발 퍼포먼스에 맞춰 퍼레이드 인파가 무빙 워크 탄 듯 밀려들었다. 진귀한 풍경과 맞닥뜨리며 태극기도 흔들고 사진도 찍어야 하는데 긴장도가 높을수록 배의 근육들이 창자를 더욱 옥죄었다. 그런 와중에도 왼발은 간이 화장실에 줄을 세워두고 나머지 발은 관람석 속에 끼워 놨다. 퍼레이드가 이어지고, 내 왼발 뒤엔 모자며 어깨에 별 세 개를 단 군인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그에게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뒤 태극기를 흔들다가 사진 몇 컷을 찍고 되돌아오길 거듭했다. 내 표정을 읽은 군인이 미소를 지으며 얼른 볼일 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나만큼 급해 보였던 그였지만 쿠바노들 대물림된 인내심에다 호세 마르티 동상이 군인 정신을 테스트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지 가까스로 버텨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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